[광화문에서/장환수]기다림의 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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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1월 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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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하루 멀어져간다/내뿜은 담배 연기처럼/작기만 한 내 기억 속에 무얼 채워 살고 있는지/점점 더 멀어져간다/머물러 있는 청춘인 줄 알았는데(서른 즈음에). 서른 살 김광석은 매일 이별하며 살고 있는 청춘을 노래했다. 가을 지나면 어느새/겨울 지나고 다시 가을/날아만 가는 세월이 야속해 붙잡고 싶었지(내 나이 마흔 살에는). 마흔 살 양희은의 세월은 날아간다.

또 한 살 먹었다. 누군가 그랬다. 나이에 2를 곱하면 세월의 빠르기라고. 시속 20km인 10세 소년의 세월은 더디기 한이 없다. 50대 중년의 삶은 과속 딱지 떼기 십상이다. 80대 노인의 연광(年光)은 선동열의 강속구를 앞지른다.

승부의 세계도 시간과 관련된 상대성 원리가 적용된다. 경마나 카지노가 로또나 토토보다 중독성이 강한 것은 즉석에서 승부가 나기 때문이다. 축구 대표팀의 A매치는 시즌 내내 열리는 K리그를 압도한다. 야구는 투수가 공 한 개를 던질 때마다 크고 작은 승부가 결정된다. 그래서 한 번 빠져본 사람은 헤어나기 힘들다. 타이거 우즈가 12년간 이룬 골프 역사상 가장 찬란했던 업적은 그의 사생활이 알려지면서 한순간에 무너졌다. 이런 극적인 승부는 여태 본 적이 없다.

하지만 빠르다고 무조건 재밌거나 좋은 것은 아니다. K리그가 출범 27년이 되도록 정상 궤도에 오르지 못한 이유는 기다림의 미학이 없었던 때문이다. K리그에서 시작된 열기가 A매치로 이어져야 하는데 그 반대였으니 한국 축구는 월드컵이 열리는 해에만 반짝하는 머리만 큰 아이가 됐다.

반면 글로벌 스포츠가 아닌 야구는 A매치가 별로 없는 종목의 특성상 프로 리그를 살리는 데 주력한 게 적중했다. 2008년 6월 22일 일요일에 서울월드컵경기장에서 한국과 북한의 월드컵 3차 예선이 열렸다. 상암벌을 메운 관중은 4만8519명. 거의 동시간대에 열린 프로야구 관중은 토요일인 전날보다 오히려 8000여 명이 늘어난 총 4만9703명이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서울월드컵경기장을 사이에 둔 잠실과 문학야구장의 관중이 3만8742명이었다는 사실. 유료 관중과 실제 좌석 점유율에서 큰 차이가 나는 두 종목이기에 잠실과 문학이 남북 대결보다 유료 관중은 물론 실제 관중이 더 많았을 수도 있었다. 당시 이 사실에 주목하는 이는 거의 없었지만 기자는 무릎을 쳤다. 결국 프로야구는 2008년과 지난해 대박 행진을 벌이며 시즌 600만 관중 시대를 눈앞에 두게 됐다.

미국과 유럽의 프로 리그는 더욱 부럽다. 응원하는 팀이 포스트시즌 진출이나 선두 경쟁에서 멀어져도 관중은 항상 미어터진다. 보스턴 레드삭스의 우승을 86년간, 4대에 걸쳐 기다린 팬도 있었다. 승패보다 경기 자체를 즐기는 기다림의 미학이 생활화된 덕분이다.

우즈의 여성 편력은 비난받아 마땅하지만 기자는 그의 강렬함을 잊을 수 없다. 불혹의 나이에 머리를 알록달록 물들였어도 500경기 넘게 출장한 김병지의 꾸준함이 좋다. 한 번씩 과격해져서 탈이지만 순위나 승패에 관계없이 ‘부산 갈매기’를 목청껏 부르는 롯데 팬이 살갑게 느껴진다. 에드먼드 힐러리 경이 55년간 보여준 헌신과 사랑은 에베레스트를 누가 먼저 올랐는지 따지는 게 부질없는 일이라고 웅변한다.

너무 쉽게, 너무 빨리 변해가는 세상. 새해에는 좀 더 호흡이 긴, 그래서 훨씬 감동을 더하는 명승부들을 만끽하고 싶다.

장환수 스포츠레저부장 zangpab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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