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년 릴레이 시론<2>/주경철]전염병보다 무서운 공포심

  • 동아일보
  • 입력 2009년 12월 2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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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저명한 역사가 윌리엄 맥닐은 인류 역사를 전염병과의 싸움이라는 관점에서 재해석했다. 그에 따르면 역사는 인간 집단 간의 지배와 복종, 착취를 의미하는 거시기생(macro-parasitism)과 인간과 병균 사이의 관계를 의미하는 미시기생(micro-parasitism)이라는 두 차원에서 진행됐다. 주목할 점은 이 두 차원이 실제로는 매우 긴밀하게 연결돼 있다는 사실이다. 예컨대 중세 말에 유라시아 대륙 전체에 엄청난 충격을 가한 페스트의 발병은 몽골 제국의 급속한 팽창, 그리고 영국과 프랑스 사이의 100년전쟁 같은 현상과 어우러져 일어난 일이다.

인간-병균 장기적인 상호적응

병균은 인간을 숙주로 삼아 생명을 유지하려 하지만 인간의 몸은 거기에 대항하는 면역체계를 갖췄다. 양자는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진화한다. 사실 병균 쪽에서 생각해 보면 인간의 면역체계를 뚫고 들어가서 번식해야 하지만 그렇다고 너무 강력하게 병을 일으켜서 숙주인 인간 집단 전체가 몰살되면 그들도 생명을 이어갈 수 없다.

따라서 인간 집단과 병균 사이에는 장기적으로 상호 적응 과정을 거쳐서 결국 어느 정도 타협적인 관계를 맺게 된다. 이렇게 되면 일부 사람이 병에 걸리더라도 면역을 갖췄기 때문에 병세가 아주 위독하지는 않은 상태가 되며, 또 해당 사회는 대개 그 병에 대한 치료책도 준비해 갖고 있다. 이런 식의 진화가 진행된 결과 각 문명권은 그곳만의 특유한 병을 지니게 된다.

문제는 어떤 계기에서든 한 지역의 병균이 갑자기 다른 지역으로 전해질 때 일어난다. 면역체계와 치료책이 준비되지 않은 곳에 느닷없이 새로운 병균이 들이닥치면 엄청난 피해를 주는 전염병이 발생한다. 인구의 대다수가 병균에 적응하여 면역체계를 갖추기까지는 상당히 오랜 시간이 소요되는데, 그때까지 수많은 사람이 희생될 수밖에 없다.

이런 일은 역사에서 빈번하게 일어났다. 가장 극적인 사건은 콜럼버스의 항해 이후 구대륙의 병균이 아메리카에 유입된 일이다. 유럽인 선원은 의식하지도 못하는 새에 천연두 홍역 장티푸스 성홍열 디프테리아 등의 병균을 갖고 갔다. 1만 년 이상 거의 완벽하게 고립되어 살아온 터라 이런 병에 대한 면역이 전혀 없던 인디언은 엄청난 희생을 치러야 했다. 특히 천연두가 가장 큰 피해를 주어서, 16세기에 아메리카 대륙에서 이 병으로 죽은 사람만 2000만 명으로 추산된다. 14세기의 페스트, 19세기의 콜레라, 20세기 초의 스페인독감도 갑자기 낯선 병균이 전파되면서 일어난 일이다.

차분히 대비하면 피해 최소화

그러므로 전염병의 유행은 그 자체가 인류 역사에서 늘 일어나는 상수(常數)와도 같다. 올해 세계적으로 유행한 신종 인플루엔자 역시 마찬가지이다. 하나의 전염병이 지나가면 언제든 새로운 전염병이 들이닥칠 수 있다. 이런 사실을 잘 인지하고 대비책을 마련하는 일이 중요하다. 어느 역사가는 선진국이란 인프라(하부구조)가 튼튼한 국가라고 말한 바 있다. 자연의 재앙에 대해 사회가 철저히 대비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강력한 태풍이 들이닥쳤을 때 동남아시아의 일부 국가에서는 수많은 이재민이 생겨나지만 한국이나 일본에서는 대개 몇 명의 희생자만 생긴다.

전염병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의료 체계를 잘 갖추고 차분히 대비하면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다. 역사상 유명한 전염병 시대를 되돌아보면 사람이 겁에 질려 공황상태에 빠지거나 인종적 종교적 비난을 가하면서 증오를 폭발시키는 바람에 더 큰 피해를 보곤 했다. 어쩌면 병균보다도 오히려 이런 것이 더 두려운 사태를 초래할지 모른다. 전염병은 생물학적 사건일 뿐 아니라 사회·문화적 사건이기도 하다.

주경철 서울대 교수·서양근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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