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이진녕]탈북자 장진성 씨의 조국

  • Array
  • 입력 2009년 12월 21일 20시 00분


코멘트
북한 조선노동당 작가로 활동하다 2004년 탈북한 장진성 씨의 탈북수기가 얼마 전 일부 인터넷 매체를 통해 공개됐다. 장 씨는 북한 주민의 참혹한 실상을 고발하는 ‘내 딸을 100원에 팝니다’라는 시집을 낸 탈북 시인으로 유명하다. 그는 자신의 탈북은 다른 탈북자들에 비하면 순탄한 편이었다고 했지만 수기에 담긴 내용은 한 편의 극적인 드라마 그 자체였다. 무엇보다 가슴이 뭉클했던 것은 10회에 걸친 수기 연재를 마친 뒤 11번째로 쓴 후기였다.

장 씨는 한국의 젊은이들에게 부르짖고 싶다고 했다. “당신들에겐 그냥 태어난 대한민국이지만 우리 탈북자들에겐 이렇게 죽기를 각오하고 찾아오지 않으면 안 되는 대한민국이었고, 정녕 조국이란 태어난 곳이 아니라 죽어서도 묻히고 싶은 곳이라고.” 장 씨는 또한 대한민국의 어르신들에게 엎드려 큰절을 드리고 싶다고 했다. “내 조국 반쪽이라도 이렇듯 자유의 땅, 민주의 땅, 선진화의 땅으로 만들어 주셨기에 우리는 우리의 생명도 사람의 것이라고 기어이 살아서 가리라 외치며 사생결단 찾아올 수 있었다고.”

지금 이 땅에서 숨쉬고 살면서 대한민국이란 조국을 장 씨처럼 진심으로 그리워하고, 고마워하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솔직히 나 자신부터가 부끄럽다.

우리는 지난 100년간 숱하게 많은 조국을 경험했다. 일제의 식민 침탈 속에서 피 흘리며 구해내려 발버둥친 조국이 있었고, 반쪽이나마 제대로 나라 구실을 하도록 정성을 모아 일으킨 조국이 있었다. 공산주의의 나락에 빠질 뻔했던 것을 간신히 건져낸 조국이 있었고, 국민을 배고프고 등 시린 고통에서 해방시키고 자유와 민주를 만끽하도록 하기 위해 온갖 고난을 겪으며 일구어낸 조국도 있었다. 어느 것 하나 소중하지 않은 것이 없다. 장 씨 같은 탈북자들이 죽기를 각오하고 찾아오려고 했던 지금의 대한민국은 저절로 생겨난 것이 아니라, 지나온 이 모든 조국의 토양이 있었기에 만들어질 수 있었던 것이다.

앞으로의 조국을 가꾸어 가는 작업은 이제 우리의 몫이다. 국민 각자가 마음속에 그리는 미래의 조국은 제각기 다르겠지만, 최대공약수를 산출한다면 2년 전 대선 때 시대정신으로 표출된 선진 대한민국일 것이다. 이명박 대통령은 그 염원으로 당선됐고, 그 염원을 반영해 선진화를 통한 세계일류국가 지향을 국가비전으로 제시했다. 선진화란 ‘각자가 스스로 자기의 몫을 다하며, 공공의 복리를 위해 협력하는 사회, 풍요와 배려와 품격이 넘치는 나라를 의미한다’고 이 대통령은 취임사에서 정의했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그 목표를 향해 제대로 나아가고 있는가.

청와대 관계자는 “지난 2년은 이전 정부 10년과는 다른 차원에서 선진화의 기초를 닦은 기간”이라고 했지만 솔직히 동의하기 어렵다. 여기저기 헤집으며 시행착오를 거듭한 흔적은 보이지만 기초는 보이지 않는다. 정부가 정녕 소명의식에 투철했는지 의문이고, 특히 우리 사회 모든 부문의 선진화를 앞에서 견인해야 할 정치는 거의 구제불능 상태이다. 이 지경으로 계속 간다면 선진화가 아니라 후진화로 가지나 않을까 걱정될 정도이다. 그 책임에 관한 한 정부 여당이나 야당이나 공동 대주주이다.

탈북자 장 씨는 “나는 내 목숨이 소중하고 내 삶이 이렇듯 풍부해질 수 있다는 것을 이 땅에서 처음 느꼈다”고 했다. 당장 오늘부터라도 정치가 변하지 않는다면 그런 조국은 점점 멀어져 갈지 모른다.

이진녕 논설위원 jinnyong@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