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성폭행 피해자의 정신적 충격 키우는 수사와 재판

  • 동아일보
  • 입력 2009년 11월 3일 03시 00분


경찰 검찰이 ‘나영이(가명) 사건’을 조사하면서 피해자에게 성폭행 과정을 여러 차례 반복 진술하게 만들어 정신적 충격을 가중시킨 책임을 묻는 손해배상 소송이 추진된다. 대한변협은 나영이의 피해 과정에 대한 반복 조사에 문제가 있었다고 보고 국가를 상대로 한 손해배상 소송 지원 방안을 강구하고 있다. 법조계와 의료계에서는 성폭행범에 대한 엄격한 형사처벌 못지않게 피해자 조사 방식이 획기적으로 바뀌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정신과 전문의들은 어린이 성폭행이나 성추행 사건을 조사할 때는 반드시 정신과 의사가 자리를 함께해 심리적 충격이 확대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경찰이나 검찰은 조사과정에서 피해자가 당하는 2차 충격보다는 사실관계 입증에 주로 관심을 쏟는 게 보통이다. 법원의 재판과정 역시 큰 차이가 없다. 의사들조차 신체 상해(傷害)에 대한 외과적 치료에만 관심을 갖는 경향이 있다.

나영이의 정신 치료 주치의인 연세대 신의진 교수는 “나영이는 지금도 TV에서 큰 소리가 들리거나 잔인한 장면이 나오면 놀라고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떤다”고 말했다. 신 교수는 “이런 사건은 수사보다 치료가 우선”이라고 강조한다. 그는 “아이에게 반복된 진술을 요구하면 상처가 더욱 커지고 진술은 오히려 불명확해진다”면서 “증거 확보와 수사협조 여부도 의사가 판단하게 하는 시스템이 필요하다”고 제언한다.

수사기관들은 피해자 조사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2차 정신적 피해에 유의해야 한다는 데 동의하면서도 이미 존재하는 제도조차 제대로 이용하지 않는다. 성폭력 범죄의 처벌 및 피해자 보호 등에 관한 법률은 2차 피해를 방지하기 위한 여러 제도를 규정하고 있지만 잘 활용되지 않는 실정이다. 대표적인 것이 ‘진술녹화 제도’다. ‘16세 미만이나 신체 또는 정신장애인의 경우 가족이나 신뢰관계가 있는 사람의 입회하에 진술을 녹화했을 때는 증거로 채택할 수 있다’고 돼 있다. 피해자가 수사기관이나 법정에 나가 직접 증언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그러나 법원은 수사기관의 녹화물을 믿지 못해 피해자를 법정으로 불러내 직접 증언을 듣는 경우가 허다하다. 성폭력 전담검사 제도의 의미를 살리려면 검사와 수사관의 전문성을 길러야 함은 물론이고 정신과 의사가 조사과정에 동석(同席)하는 시스템을 갖춰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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