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이강근]낙산사의 새 천년을 위하여

  • 입력 2009년 10월 8일 02시 5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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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시대인 8세기에 의상대사가 창건한 이래 1000년 이상 법등을 유지한 낙산사가 12일에 낙성을 축하하는 회향식을 갖게 됐다. 2005년 4월 5일 식목일에 일어난 양양 지역 산불로 소실된 지 4년 6개월 만이다. 길지 않은 기간에 낙성을 보게 된 데는 정부와 불교계의 지원은 물론 다른 종교를 비롯한 각계각층의 관심과 협조를 밑거름으로 낙산사 사중이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기 때문이니 전화위복이라 이를 만하다.

세조 창건당시 모습으로 복원

소실되기 전의 낙산사는 6·25전쟁의 참화를 복구하던 1953년에 지었다. 낙산사의 오랜 모습과는 거리가 멀었던 게 사실이다. 이번 복원 과정에서는 잔해 더미를 치우고 그 아래의 절터를 발굴 조사하여 여러 시대에 걸친 문화층을 확인했다. 통일신라시대 유적을 확인함으로써 창건 사적과의 역사적 연결 고리를 찾아내는 성과를 올리기도 했다. 이를 근거로 문화재위원회는 낙산사 일원을 국가 문화재인 사적으로 지난해에 지정했다.

중심 시설인 원통보전 영역은 조선 세조(재위 1455∼1468)가 창건했다. 이 모습은 단원 김홍도(1745∼?)가 그렸다고 전해지는 60폭 금강산화첩 중의 한 폭인 ‘낙산사도’에서 볼 수 있다. 16세기 말부터 17세기 초까지 전국을 초토화시킨 두 전란, 즉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화를 입지 않았으리라는 가정을 전제로 한다. 낙산사복원자문위원회는 발굴조사 결과와 이 그림을 근거로 하여 원통보전 영역을 재건하도록 지도함으로써 낙산사의 중심 영역은 조선 초기 세조 당시 가람의 모습으로 신축됐다.

불타기 직전의 모습이 아니라 낙산사의 역사에서 가장 번성한 시기로 짐작되는 조선 세조 때 모습으로 복원을 시도할 수 있었던 것은 국립문화재연구소의 발굴조사와 김홍도의 ‘낙산사도’ 덕택이었다. 발굴조사로 새롭게 알게 된 통일신라 시기의 유적은 고고학적으로 충분한 가치를 지녀서 사역 전체를 사적으로 지정하는 바탕이 됐지만 이번 복원안에는 반영하지 않았다.

불타기 직전의 건물은 낙산사 사중에게 꼭 필요한 시설이었으니 재건하면 용도가 저절로 생긴다. 발굴조사로 새롭게 밝혀진 건물터 위에 새롭게 재건한 건물은 어떤 용도로 사용해야 좋을까. 세조 당시의 모습은 갖추었으되 세조 당시의 용도를 찾아 사용할 수는 없지 않은가. 국책 사업으로 장기간 복원된 서울의 조선 궁궐을 앞으로 어떻게 활용해야 할 것인가 하는 고민에서 보듯 복원 이후 활용 문제는 문화재 복원의 당위성과 맞물려 있다. 낙산사 측에서는 국민적 성원을 바탕으로 낙산사를 빠른 시일 안에 복원할 수 있었던 만큼 새로 재건한 건물을 명상센터나 무료찻집 등 누구나 이용할 수 있는 시설로 개방하겠다는 대안을 내놓았다.

화재현장 미흡한 연구 아쉬워

낙산사 복원이 한창 진행 중이던 지난해 2월 11일 국보 1호인 숭례문이 방화로 소실됐다. 낙산사 소실 이후 정부가 소방 방재 대책을 소홀히 했다는 질책이 이어졌고, 이후 마련된 대책은 낙산사의 화재예방시스템 구축에 고스란히 반영했다. 그러나 산불이 이어 붙은 통로 위에 건물을 다시 세우지 말아야 한다는 풍수적인 주장을 학문적으로 검증하여 논박하기 위해서라도 화재 현장에 대한 과학적인 연구를 전문가에게 맡겨서 충분히 연구하고 대책을 수립했어야 했다. 낙산사는 복구를 서두른 나머지 이런 기회를 갖지 못했지만 숭례문 화재를 겪은 이후에야 비로소 잔해에 대한 연구의 중요성을 인식하게 됐다. 낙산사와 숭례문 소실이 우리의 정신이자 혼인 문화재를 더욱 아끼고 체계적으로 관리하는 계기가 되기를 희망한다.

이강근 경주대 문화재학부 교수 문화재청 문화재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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