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눈/이종식]서민 피 말리는 늑장재판 언제까지

  • 입력 2008년 10월 13일 02시 57분


권영길 민주노동당 의원은 1994년 민주노총 준비위원장 자격으로 서울지하철 노조 파업에 찬조연설 등을 한 혐의(옛 노동쟁의조정법상 제3자개입금지위반 등)로 1995년 12월 기소됐다.

이후 20여 차례의 재판이 진행되던 와중에 노동쟁의조정법은 1997년 3월 노동조합법으로 통합됐고, 1심 재판부는 5년여 만인 2001년 1월 권 의원에게 징역 10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권 의원은 항소했지만 이듬해인 2002년에 대통령선거에 출마하면서 재판은 또 차일피일 미뤄졌다.

벌금 1500만 원으로 형량이 낮춰진 2심 선고도 5년 뒤인 2006년 1월에야 내려졌다. 사건은 이제 대법원에 넘어가 있지만 기소 햇수로 14년째인 지금까지도 이 사건은 매듭지어지지 않고 있다.

권 의원 사건이 특이한 사례라고 치부하더라도 법원의 고질병인 재판 지연은 그 피해가 서민들에게 더욱 크게 돌아갈 수 있다는 점에서 가벼이 볼 게 아니다.

돈 있고 힘 있는 사람들이야 어떻게든 재판을 질질 끌어 상황이 유리하게 바뀌기를 기다리면 그만이다. 반면에 서민들에겐 ‘송사 3년에 집안이 거덜 난다’는 게 냉엄한 현실이다.

요즘처럼 경기가 안 좋을 때는 몇백만 원, 몇천만 원짜리 민사소송이 지연돼도 파산하는 서민이 속출한다. 그렇지만 서민들의 삶과 밀접한 민사소송 1심 소송의 경우 수도권 법원을 기준으로 올해 8월 말 현재 법정기간(접수 뒤 5개월 이내)을 넘긴 사건이 5건 중 한 건꼴이다.

헌법재판소도 사정은 마찬가지. 올해 8월 말 현재 법정기간(접수 뒤 180일 이내)을 넘긴 심판사건의 비율은 전체의 64%에 이른다.

매년 국회 국정감사 때마다 재판 지연문제는 단골메뉴처럼 지적된다. 이에 대해 법원과 헌재는 “법정기간은 훈시규정일 뿐이고 업무량이 너무 많아 시간이 걸린다”는 ‘앵무새 답변’만 되풀이한다. 간이심리제도 도입 같은 매년 거론되는 제도 개선 문제는 그때뿐이다.

지난해 판사 1명이 하루 평균 2.3건의 판결을 내릴 정도로 업무량이 많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지연된 정의는 정의가 아니다’라는 법언처럼, 힘 있는 사람을 위한 시간 끌기 재판이나 서민의 피를 말리는 늑장 재판은 결론이 어떻든 그 과정 자체가 불의(不義)가 될 수도 있다.

이종식 사회부 bell@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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