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 포커스/김성원]미얀마 곡창의 슬픈 역사

  • 입력 2008년 5월 13일 02시 59분


사이클론 나르기스(Nargis)는 무서웠다. 시속 200km가 넘는 엄청난 속도의 이 비바람은 순식간에 수만 명의 사상자와 수십만 명의 이재민을 발생시켰다. 과거에도 간혹 세찬 바람이 불어 닥쳤지만 이렇게 큰 규모는 처음이다. 미얀마 최남단에 나란히 위치한 에야와디 주(州)와 양곤 주가 주 타깃이었다. 피해규모는 에야와디 주가 훨씬 크며 피해도 계속 늘고 있다.

미얀마 현지어 발음으로 에야와디라고 하는 이라와디 강은 장장 2170km나 된다. 미얀마 최북단에 자리 잡은 카친 주에서 발원해 최남단 에야와디 주까지 유유히 흐른다. 물길은 왕조시대 도읍이었던 버간, 잉와, 만달레이를 포함해 북에서 남으로 걸쳐 있는 주요 도시들에 생명수를 공급하고 에야와디 주에 다다른다. 에야와디 주는 미얀마의 14개 주 가운데 인구가 가장 많고 인구밀도가 가장 높다. 남단에는 거대한 삼각주가 형성돼 있어 미얀마 최대의 곡창지대다. 한때 미얀마가 세계 쌀 수출 1위국이었을 정도로 많은 양의 쌀을 수확하는 곳이다.

과거 에야와디 삼각주는 지금처럼 넓지 않았으며 농사짓기도 어려웠다. 오랜 세월에 걸쳐 상류에서 밀려 내려와 쌓인 진흙들이 바다를 조금씩 메우면서 습지를 형성했다. 이것을 19세기 말 영국이 본격적으로 미얀마를 식민지배하면서 대규모 간척사업을 벌여 농토로 변모시켰다. 해방 이후 지금까지 거의 쇄국정치를 하며 지내온 미얀마는 기후변화에 탄력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여건을 거의 조성하지 않았다.

3년 전 지진해일(쓰나미)이 이웃 태국과 인도네시아 등지를 초토화시켰을 때 다행히 미얀마는 큰 피해 없이 지나갔다. 당시 미얀마 국민들은 쓰나미가 군사정부를 무서워해 피해 갔다는 말들을 했다.

그러면 이번 미얀마를 덮친 나르기스는 정부보다 세단 말인가. 아마 미얀마 국민들은 그렇다고 생각할 것이다. 정부도 나르기스 앞에 맥도 못 추고 전전긍긍할 것으로 여길 것이다. 그렇다면 이 틈을 타 8개월 전 실패했던 반정부 운동의 불길을 다시 지필 것인가. 그러면 군사정부를 몰아내고 국민이 원하는 정부를 세울 수 있을 것인가.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시위가 발생할 수는 있어도 정부의 여지없는 대응으로 시위는 효과 없이 끝날 것이다. 이럴 경우 국민들은 또 자조 섞인 말을 만들어낼 것이다. 정부는 나르기스보다 약하지만 우리보다는 강하다고.

지금 피해지역에는 상처를 치료할 약품도 없고, 주민들은 집을 잃고, 굶고 있을 뿐만 아니라 악성 전염병이 번질 우려까지 있어 심각한 상황이다. 그러나 미얀마 정부는 이들에게 딱히 해줄 것이 없는지 대처가 느리다. 외국이 내미는 적극적인 구호의 손길도 그리 썩 달가워하지 않는 눈치다. 구호품만 반입하고 되돌아가라는 식이다. 안을 보이고 싶지 않은 마음인지, 물품을 이용해 국민들에게 생색을 내고 싶은 건지 알 수 없다. 대신 정부는 하루라도 빨리 신헌법이 제정되길 바라고 있는 듯하다. 이 와중에 국민투표를 강행하고 있으니 말이다.

타는 목마름을 해갈하는 시원한 물 축제를 치른 지 한 달도 되지 않아 나르기스라는 바람이 실어온 물폭탄을 맞은 미얀마가 참으로 안타깝다. 동남아의 열대성 서남풍이 닥치는 이맘때가 되면 고온으로 증발한 인도양의 물이 습기가 돼 몬순에 편승해 미얀마를 비롯한 대륙부 동남아지역에 비를 뿌린다. 이때 그동안 왜소해졌던 이라와디도 다시 살을 찌운다. 이렇게 이라와디는 순환하며 불교가치인 윤회를 떠받드는 미얀마인들과 함께하고 있다. 비바람에 할퀴여 상처받지만 또다시 풍요로워질 날들을 기다리며….

김성원 부산외국어대 교수 미얀마어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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