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이수형]버지니아산(産) 늑대와 뉴욕 주 대법원

  • 입력 2006년 2월 15일 03시 0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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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6년 어느 날.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수상자가 결정되었다는 뉴스가 외신에 보도됐다. 주인공은 엘리자베스 테일러. 작품은 ‘Who's Afraid of Virginia Woolf?’ 에드워드 알비의 원작 희곡을 바탕으로 만든 영화다.

다음 날 이 영화의 제목을 전한 국내 기사가 가관이었다.

‘누가 버지니아산(産) 늑대를 두려워하랴.’

얼마 전 서울대 법대 안경환(安京煥) 교수에게서 들은 이야기다. 페미니스트 작가이던 버지니아 울프(Woolf)는 이 땅에서 엉뚱하게 ‘늑대(wolf)’가 된 셈이다.

그로부터 40년. 그 ‘늑대’는 다 사라졌을까? 그게 아닌 것 같다. 미국 문화가 거의 실시간으로 전해지고 최첨단 정보와 기술을 자랑하지만 ‘늑대’는 아직도 우글거린다.

지난달 16일 미국 화학회사 듀폰의 상속인인 듀폰 드 비(62)가 알거지가 됐다는 뉴스가 보도됐다. 물려받은 재산을 다 날리고 비참하게 살고 있다는 내용이다. 이 사실은 드 비가 자신의 재산을 관리한 신탁회사를 ‘뉴욕 주 대법원’에 제소하면서 알려졌다고 뉴스는 전했다.

의문이 생겼다. 미국에서는 대법원에 소송을 내나? 외신 원문을 찾아보았더니 소송을 낸 곳은 ‘New York State Supreme Court’라고 나와 있었다.

이게 문제였다. ‘U.S. Supreme Court’는 미국 연방대법원을 가리키지만, 뉴욕 주를 포함해 몇몇 주에서는 가장 낮은 제1심 법원을 ‘슈프림 코트’라고 부른다. 듀폰 뉴스를 보도한 통신사와 방송사, 6개 신문사가 똑같이 ‘뉴욕 주 대법원’이라고 보도했다.

지난해 12월 뉴욕 시 교통파업 사건 때도 같은 오류가 있었다. 뉴욕 대중교통노조(TWU)가 25년 만에 전면 파업을 하자 ‘뉴욕 주 대법원’이 노조에 하루 100만 달러씩 벌금을 내라고 판결했다는 보도였다.

‘뉴욕 주 대법원’은 어쩌다 발견되는 희귀 사례가 아니다. 미국 법에 관한 한 거의 모든 보도에는 크든 작든 오류가 있다.

이달 초 일부 언론은 미국의 ‘부분 출산(partial birth) 낙태’ 논란을 보도했다. ‘부분 출산’은 ‘태아의 머리 전체나 몸통 일부분이 산모의 몸 밖으로 나온 상태에서 아기를 지우는 것’이라는 설명이 이어졌다.

‘partial birth’는 산모의 자궁을 확대해 임신 6개월 이상 된 태아를 끌어낸 뒤 머리 부분에 주사기로 약물을 투입해 사망시키는 것이다. 낙태 자체도 문제지만 그 방법이 끔찍해 연방 차원에서 이를 금지하는 법(partial birth abortion ban act)이 제정돼 논란을 빚는 것이다. 이를 ‘부분 출산’으로 옮기면 무슨 뜻인지, 왜 논란이 일고 있는지 이해할 수 없다.

최근에는 ‘파기하다’라는 뜻의 ‘overrule’을 ‘지나친 법률’이라고 기상천외하게 번역한 경우도 있었다.

‘법의 무지는 용서받지 못한다’는 말은 국제화 시대 국제법 문제에도 그대로 타당하다.

이수형 사회부 차장 soo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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