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 제네바 합의를 추진할 당시에는 경수로 완공 전에 북한이 붕괴할 것이란 기대가 있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빌 클린턴 행정부 시절 북-미는 갈등을 겪기는 했지만 고비마다 합의를 이끌어 내고 제네바 합의를 이행해 나갔다. 클린턴 행정부의 ‘개입과 확대 정책’과 북한의 생존 전략 사이에 이익의 조화점이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조지 W 부시 행정부가 출범하면서 합의 이행에 적신호가 켜졌다. 부시 행정부는 제네바 합의와 페리 프로세스 이행에 큰 관심을 보이지 않고 북한의 핵, 미사일, 재래식 무기를 포괄적으로 해결할 것을 요구하면서 ‘힘을 통한 패권안정 정책’을 추진했다. 2002년 10월에 불거진 HEU 핵개발 의혹은 제네바 합의의 사문화와 경수로 사업 종료를 촉진했다.
하지만 경수로 제공 문제는 6자회담의 주요 의제로 앞으로 해결해야 할 ‘뜨거운 감자’다. 2005년의 9·19 공동성명에서 당사국들은 ‘적절한 시기’에 경수로 제공 문제를 논의하기로 동의했고, 한국은 북한에 200만 kW의 전력을 공급한다는 ‘중대 제안’을 재확인했다. 지금은 경수로 공사가 중단되고 청산 절차에 들어가지만 북한의 비핵화 실현 여부에 따라 경수로 공사는 재개될 수 있는 여지를 남겨 두고 있다.
북한은 제네바 합의를 지켜 내고 경수로를 제공받기 위해 지난 10년간 ‘고난의 행군’을 했다고 할 수 있다. 공동성명 발표 다음 날 북한이 ‘경수로 제공 즉시 핵확산금지조약(NPT) 복귀’를 선언한 것도 그만큼 경수로 문제에 집착하기 때문이다. 북한의 위조지폐와 관련한 미국의 금융제재로 2단계 5차 6자회담이 열리지 못하고 있지만, 공동성명 합의 이행의 관건은 경수로 제공 문제와 북한의 NPT 복귀 시기 및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안전조치 이행 문제를 어떤 절차와 순서에 따라 해결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북한에 있어 신포 경수로가 갖는 상징적이고 실리적 의미는 매우 크다. 북한은 제네바 합의에 따라 건설을 중단하고 동결한 중수로 방식의 핵 발전 시설(태천 200만 MW, 영변 50만 MW)에 대한 전력 손실 보상 차원에서 경수로 건설을 요구하고 있다. 아무런 대가 없이 경수로 공사를 종료할 경우 북한 지도부는 리더십에 큰 손상을 받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우리 정부도 경수로 공사 중단과 청산에 따른 막대한 경제적 손실과 관련한 문제,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KEDO)의 유지 또는 해체 문제, 직접 송전 문제 등 많은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가장 바람직한 방법은 북한이 비핵화를 조속히 실현하고, 과도적으로 우리 정부의 중대 제안을 수용하며, 장기적으로 경수로 공사를 재개하는 것이다. 청산은 최악의 해법이다. 관련 당사국 모두가 득이 되는 해법을 찾아야 한다.
한반도의 국력 격차를 보여 주는 상징적 장면이 한반도의 야간 위성사진이다. 휴전선 이남은 전역이 밝게 빛나지만, 이북은 평양과 원산 등 일부 지역만 불빛이 보일 뿐 암흑천지다. 경수로를 착공할 때만 해도 전력이 공급되면 ‘동토의 땅’을 녹여 자본주의의 싹을 틔울 것으로 기대를 모았다. 북한이 경수로를 제공받아 경제를 재건하기 위해서는 ‘불량 국가’에서 ‘정상 국가’로 변신하여 자본주의 세계경제로 편입하는 길뿐이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북한은 ‘잃어버린 10년’을 되찾을 수 없을 것이다.
고유환 동국대 교수·북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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