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칼럼]김성곤/문학이 살아 남는길

  • 입력 2000년 5월 24일 19시 37분


‘아라비안나이트’에서 셰헤라자드는 살아남기 위한 필사적인 수단으로 이야기를 계속한다. 밤마다 새로운 이야기로, 그리고 재미있는 이야기로 왕을 즐겁게 하지 못하면 언제라도 사형을 당하게 되어있기 때문이다. 셰헤라자드는 자신의 그러한 운명을 ‘천일야화’ 속 모든 이야기 속에 투영하고 있다.

그래서 ‘아라비안나이트’에는, ‘만일 제 이야기가 재미있으면 살려주십시오’와 ‘만일 네 이야기가 재미없으면 널 죽이겠다’라는 말과 구성이 부단히 반복된다. 즉 재미있는 이야기는 목숨을 살릴 수도 있지만, 청자를 즐겁게 하지 못하는 이야기꾼은 죽임을 당한다는 것이다. ‘아라비안나이트’가 각기 독립된 액자소설들로 이루어져 있으면서도, 서로 긴밀하게 연관되는 이유 또한 바로 거기에 있다.

추리소설의 원조인 에드거 앨런 포는 ‘천일야화의 천 두 번째 이야기’에서, 교만해진 셰헤라자드가 천 두 번째 날에도 이야기를 계속하다가 드디어 지루해진 왕에게 교살당했으며, 그것이 바로 ‘아라비안나이트’의 알려지지 않은 진짜 결말이라고 쓰고 있다. 이야기의 천재였던 포는 비록 한때는 성공했더라도 언젠가는 독자에게 버림을 받게될 작가의 운명을 누구보다도 더 잘 알고 있었던 것처럼 보인다.

셰헤라자드의 이야기는 모든 작가들의 원초적 딜레마를 잘 보여주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학은 아직도 스스로를 모든 예술의 정점에 놓고 있으며, 작가들 역시 과거의 자만에 빠져 독자들의 이탈을 눈치채지 못하고 있다.

지금은 문학말고도 재미와 감동을 주는 것들이 많고, 독자들의 감수성 또한 급속도로 변해가고 있는데도 말이다. 그렇다면 그 결과는 문학과 작가의 죽음뿐이라고 ‘아라비안나이트’와 ‘천일야화의 천 두 번째 이야기’는 경고하고 있다.

정말이지 변화를 거부하는 구태의연한 양식의 문학과, 대학 강의실을 빼고는 아무도 읽지 않는 난해한 모더니즘 문학은 이제 죽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문학은 다른 형태로 살아남을 것이고, 다른 예술 장르들과 제휴할 것이며, 다른 문화 텍스트들과 혼합해 새로운 양식을 창출해낼 것이다.

컴퓨터와 문학이 결합해 만들어낸 하이퍼텍스트나, 영상 시 또는 PC통신 문학 같은 것들은 그 한 시도일 것이다. 작가들은 이제 하나의 사진, 그림, 음악, 또는 영화로부터도 상상력과 영감과 작품의 소재를 발견하게 되었다.

만일 영상매체를 문학처럼 다룬다면, 그리고 엄격한 학문적 훈련이 없이도 이해가 가능한 것들을 읽거나 보는 대가로 학점이나 학위를 준다면, 문학의 위상이 심각하게 추락할 것이라고 우려하는 학자들도 있다. 그러나 아이러니컬하게도, 예전에 제임스 조이스나 윌리엄 포크너나 T S 엘리엇을 대학에서 처음 가르치려 했을 때에도 사실은 똑같은 우려들이 있었다. 경박한 현대의 실험작가들이 위대한 문학의 전통을 파괴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날 위 작가들은 모두 정전(正典·canon)에 속하는 전통적인 작가들이 되었다.

또 순수문화를 포기하는 것은 상아탑에 대중문화를 불러오게 될 것이라고, 그래서 예술과 학문의 세속화를 초래하게 될 것이라고 우려하는 시각도 있다. 그러한 우려는 물론 대중문화를 저급한 통속문화와 동일시하기 때문에 생겨난다. 그러나 반 귀족문화로서의 대중문화는 분명 저급문화와는 다르며, 이제는 무시 못할 우리 삶의 일부가 되었다. 만일 텔레비전과 컴퓨터로 인해 이제는 우리 모두가 대중문화의 향유자가 되었고, 예술이나 문학 또한 더 이상 우리의 삶과 유리된 지고의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순수문화와 대중문화의 이분법적 구분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을 것이다.

순수문학과 정전을 수호하는 고급문화의 십자군들은 대중문화의 침입이 문학의 성지를 위협하고 어문학과의 위기를 초래한다고 개탄하고 있다. 그러나 문학의 위기는 오히려 그러한 폐쇄적 문화귀족주의로부터 비롯된다는 것, 그리고 사실은 성지와 정전의 개방이야말로 어문학과에 활로를 제공해주는 생존의 전략이라는 사실을 도대체 어떻게 그들에게 설명해줄 수 있단 말인가? 왜 우리는 시대의 변화를 외면하고, 아직도 과거의 영광에 대한 향수와, 철 지난 모더니즘의 패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가?

김성곤<서울대교수·문학과 영상학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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