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이진영]정치 예능의 시대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2월 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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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영 채널A 심의실장
이진영 채널A 심의실장
‘반기문 불출마 선언’이 나왔던 1일 온라인은 ‘봉 도사의 소름 돋는 예언’으로 들썩였다. 정봉주 전 통합민주당 의원이 지난달 24일 채널A ‘외부자들’에 나와 “반기문 진영(보수)의 후보가 바뀐다. 황교안으로”라고 예상한 것이 뒤늦게 화제가 된 것이다. 이 방송의 녹화일이 18일이므로 봉 도사는 2주 전 그의 중도 하차를 예견한 셈이다.

외부자들은 요즘 뜨는 종편 장르인 정치 예능이다. 정치 예능이란 정치 현안을 놓고 입담을 겨루는 토크쇼. 화요일엔 외부자들, 수요일엔 TV조선 ‘강적들’, 목요일엔 JTBC ‘썰전’이 방송된다. 미국의 언론학자인 로버트 엔트먼 조지워싱턴대 교수는 저널리즘을 전통, 주창(Advocacy), 타블로이드, 오락 저널리즘으로 분류했는데 미국의 심야 토크쇼나 한국의 정치 예능이 오락 저널리즘에 해당한다.

흥미로운 점은 정치 예능의 인기 비결이 다매체 시대를 맞아 전통 언론의 보도 원칙으로 주목받는 ‘5I’에 충실한 데 있다는 사실이다. ‘5I’란 재미있고(Interesting) 정보를 주고(Informed) 지적이며(Intelligent) 통찰력을 제공하면서(Insightful) 해석적인(Interpretive) 보도 방식이다. 미국 언론학자인 미첼 스티븐스 뉴욕대 교수가 저서 ‘비욘드 뉴스: 지혜의 저널리즘’(2015년)에서 ‘기자들이여, 제발 육하원칙(5W1H)에서 벗어나라’며 대안으로 제시한 개념이다.

진행자 남희석과 4명의 패널이 나오는 외부자들을 예로 들어 5I를 설명하면 이렇다. 우선 이 프로는 최순실 국정 농단 사태부터 사드와 국정 교과서 논란까지 정보 시민(informed citizen)으로 살아가기 위해 필수적인 현안을 다룬다. 그러면서 “빅텐트는 떴다방” “이재명은 이삭 주워 재벌 된 케이스”(이재명 성남시장이 군소 대선 후보들의 지지층을 잠식해 지지율을 올렸다는 뜻)처럼 재미있는 독설과 비유로 시청자를 붙들어둔다.

구속 기소된 김기춘 전 대통령비서실장 얘기가 나왔을 땐 지적인 대화가 오갔다. “인간적으로는 애처가이고 자식에 대한 애정이 깊은 사람이에요.”(전여옥 전 새누리당 의원) “그게 해나 아렌트가 말한 ‘악의 평범성’이죠. 나치도 훌륭한 아버지고 남편이고 성실한 직장인이었다는 거잖아요.”(진중권 동양대 교수)

이건 어떤가. “전쟁터에선 한 번 죽지만 정치를 하면 여러 번 죽는다.”(전여옥 전 의원,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 지지를 선언한 나경원 새누리당 의원을 향해 때론 실패의 위험을 무릅쓰고 ‘자기 정치’를 해야 한다며) “우리나라 검찰은 미래를 이야기하려 한다. 검사는 과거를 정리하면 되는 거다.”(안형환 전 새누리당 의원, 최순실 게이트 특검의 의욕 과잉을 경계하며)

TV 출연을 꺼리던 전여옥 전 의원은 외부자들에 나오기로 결심한 이유를 이렇게 말했다. “장사하느라 글을 읽을 시간이 없다는 분이 저더러 TV에 나와 정치 얘기를 해달라고, 그러면 올바른 투표를 할 수 있을 것 같다고 하더라고요.”

민주 사회에서 저널리즘의 존재 이유 중 하나는 유권자들이 올바른 한 표를 행사하도록 돕는 것이다. 미국 퓨리서치센터가 최근 미국 성인 376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미국의 정치 예능인 심야 토크쇼에서 2016년 대선 정보를 얻었다고 응답한 비율이 25%였다(중복 응답). 심야 토크쇼는 TV뉴스, 신문, 소셜미디어를 포함한 11개 정보원 가운데 가장 도움이 됐던 정보원 7위였다.

올해 한국 대선이 끝난 뒤 얼마나 많은 유권자가 “투표에 필요한 걸 정치 예능에서 배웠다”고 할지 궁금하다.

이진영 채널A 심의실장 ecolee@donga.com

#반기문#정봉주#외부자들#정치 예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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