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 계기, 美의 공산주의 정책 ‘억제’서 ‘해방’으로 전환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6월 2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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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66주년… 관련 책 잇달아

1950년 9월 부하 장군들과 인천상륙작전을 지휘하는 맥아더 장군(왼쪽에서 세 번째). 여문책 제공
1950년 9월 부하 장군들과 인천상륙작전을 지휘하는 맥아더 장군(왼쪽에서 세 번째). 여문책 제공
6·25전쟁은 ‘냉전 시대 벌어진 최초의 열전(熱戰)’이다. 한국과 북한뿐 아니라 21개국 군대로 구성된 유엔군과 중공, 소련군이 격돌했고, 세계 각국에 끼친 직간접적 영향도 작지 않다. 6·25전쟁 66주년을 맞아 세계사적 의미를 조명한 책이 최근 잇따라 출간됐다.

독일 역사학자인 베른트 슈퇴버는 ‘한국전쟁’(여문책)에서 “6·25전쟁이 미국의 대공산주의 전략을 ‘억제’에서 ‘해방’으로 변화시켰다”고 밝혔다. 미국은 1946년부터 6·25 이전까지 전단 배포와 라디오 방송을 통해 유럽 동부·중부, 소련 등 공산주의 국가의 국민이 독재에 맞서 싸우도록 어떻게 설득할지에 관심을 가졌지만 6·25전쟁 이후에는 군사적 ‘해방’으로 논의의 초점을 옮겼다.

전쟁은 미국과 소련의 군비 경쟁을 촉진했다. 군사 장비를 대량 생산하는 출발점이 됐고, 군사동맹 체결도 늘어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와 유사한 조약기구가 1951∼1955년 아시아에서 여럿 설립됐다. 적의 정보를 도청하는 데 특화된 미국 국가안보국(NSA)도 전쟁 중인 1952년 설립됐다. 소련은 1951년 1월 자국은 물론 동유럽 위성국가까지 포함해 거대한 규모의 군비 확장 프로그램을 시작했고, 체코슬로바키아와 동독에서는 이 프로그램의 압박으로 1953년 6월 민중봉기가 일어나기도 했다.

6·25전쟁은 중국과 소련, 두 공산주의 대국의 사이가 멀어지는 계기가 됐다. 양국은 전쟁 중 서로에게 만족하지 못했다. 마오쩌둥은 1950년 10월 스탈린에게 각종 무기 설계도와 핵무기를 요구했지만 스탈린은 끝까지 방해했다. 이때 틀어진 양국 관계는 1959년 핵폭탄 설계도를 중국에 넘긴다는 약속을 소련이 파기하면서 결정적으로 무너졌다. 1970년대 중국이 미국과 손을 잡은 것의 기원은 6·25전쟁까지 거슬러 올라간다고 할 수 있다.

서독은 6·25전쟁을 통해 경제가 도약했다. 공산품 생산 기반이 무너지고 실업자가 약 200만 명에 이르렀던 서독 경제는 군수품을 생산하면서 엄청나게 성장했다.

물론 6·25전쟁으로 가장 큰 혜택을 입은 국가는 일본이다. 남기정 서울대 일본연구소 교수가 최근 낸 ‘기지국가의 탄생-일본이 치른 한국전쟁’(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은 일본이 6·25전쟁 내내 물자와 병력 수송의 중계기지, 수리 및 보급기지, 출격 기점으로서 전진기지 역할을 담당했다고 썼다. 1953년 1월 일본 내 미군기지는 733곳에 이르렀다.

대량의 전쟁 물자 수요의 급증은 이른바 ‘조선 특수’를 낳았다. 불황에 허덕이던 일본은 군수 물자를 생산하면서 디플레이션에서 벗어났다. 미국 공식 전사(戰史)도 6·25전쟁을 ‘미국이 수행한 전쟁 가운데 군수 물자의 동원이 사실상 처음으로 강조된 전쟁’이라고 평가했다. 저자는 “일본은 2차 대전 종전 뒤 ‘평화국가’로 재기를 다짐했지만 6·25전쟁을 통해 후방 기지로 국제사회에 복귀했다”며 “일본인의 의식 속 평화국가는 실상 ‘기지국가’였다”고 말했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6·25전쟁#한국전쟁#기지국가의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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