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이태훈]마지노선 붕괴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5월 2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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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훈 사회부 차장
이태훈 사회부 차장
‘최후 방어선’의 의미로 사용되고 있는 ‘마지노선(Maginot Line)’은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에 프랑스가 독일의 공격을 막기 위해 국경에 구축한 요새선이다. 당시 프랑스 국방장관이던 앙드레 마지노의 이름을 따서 당대 최고의 축성 기술을 총동원해 750km 국경에 방어선을 만들었다. 10년간 160억 프랑(현재 가치로 약 20조 원)이라는 엄청난 돈과 인력, 기술이 투입된 마지노선은 어떤 일이 있어도 이 방어선만큼은 무너지지 않을 것이란 믿음의 상징이었다. 하지만 제2차 세계대전에서 독일군은 벨기에로 우회해 프랑스로 진격함으로써 난공불락일 것 같던 요새를 한순간에 무용지물로 만들어 버렸다.

마지노선 이야기를 꺼낸 것은 가습기 살균제 사건에서 최후 방어선이 제 역할을 했다면 고귀한 생명들이 희생되는 걸 조금이라도 막을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안타까움 때문이다. 가습기 살균제 문제에서는 ‘대기업’ ‘정부’ ‘전문가’ 등 나라를 이끌어가는 3주체가 마지노선의 임무를 부여받았다고 볼 수 있다.

국민들은 ‘빨래 끝∼’이란 광고 유행어로 유명한 옥시의 가습기 살균제가 사람을 죽일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옥시의 가습기 살균제가 2000년 이후 10년간 453만 개나 불티나게 팔렸으니 안전성을 의심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영국의 레킷벤키저가 2001년 옥시를 인수한 뒤로는 세계 최고의 글로벌 생활용품 기업이라는 이미지까지 더해져 소비자들은 옥시 제품을 더 신뢰했다.

하지만 검찰 수사로 드러나고 있는 진실을 보면 옥시를 비롯한 롯데마트, 홈플러스 등 대기업은 국민의 생명을 지킬 의지도 자격도 없었다. 2차대전 당시 프랑스는 독일 침공에 맞서 나름대로 열심히 대비라도 했다지만 가습기 살균제 시장에서 대기업이란 마지노선은 애초부터 소비자의 건강과 생명은 안중에도 없었던 모양이다. 옥시레킷벤키저 신현우 전 대표 등 책임자들은 폐 손상을 일으키는 폴리헥사메틸렌구아니딘(PHMG)의 유해성을 알고 있었으면서도 독성 실험을 거치지 않고 죽음의 상품을 내다 판 혐의가 인정돼 최근 구속 수감됐다.

대기업이 무너지면 정부라도 최후 저지선이 돼 줘야 하는데 죽음의 살균제가 10년간이나 소비자들의 몸속으로 대량 유입되는 참사에 전혀 제동을 걸지 못했다. 환경부 산하 국립환경연구원은 가습기 살균제 세퓨의 원료인 염화에톡시에틸구아니딘(PGH)이 ‘유독물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관보에 고시했다. 국민을 위한 버팀목이어야 할 정부가 14명이나 죽음에 이르게 한 독성물질이 안전하다고 하는 어처구니없는 오류를 태연하게 범한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 최고 전문가로 권위를 인정받고 있는 대학교수도 이번 사건에 가세해 온 국민을 실망시켰다. 사회적 위상이 높아서인지 교수들은 정부에서 각료 제안을 받아도 최소한 장관이고, 대학총장은 국무총리로 영입될 만큼 융숭한 대접을 받는다. 그런데도 최고 지성이라는 서울대 교수가 뒷돈을 받고 옥시에 유리한 보고서를 써준 혐의로 철창 신세를 져 모교와 교수 사회에 먹칠을 했다. 일부이긴 하지만 교수라는 전문가 집단의 마지막 방어선도 부도덕하고 엉성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국민들은 가습기 살균제 피해 사태를 겪으면서 국민의 생명을 지켜줄 최후 방어선이 없거나, 있다고 해도 한심하게 붕괴되는 걸 두 눈으로 똑똑히 지켜봤다. 특히 정부와 대기업, 대학교수 등 국가를 이끌어가는 리더들을 믿으면 목숨을 내놓아야 할 수도 있다는 섬뜩한 사실을 뼛속 깊이 깨치고 있다. 그것도 꽃망울을 피워 보지도 못하고 져버린 어린 생명들, 아기를 잉태하고 행복을 꿈꿨던 엄마들의 애통한 희생을 치르면서 말이다.

이태훈 사회부 차장 jefflee@donga.com
#마지노선#옥시#살균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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