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호의 짧은 소설]<52·끝>다시 봄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3월 3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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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레이션 김수진 기자 sooji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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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호 소설가
이기호 소설가
그는 아들과 함께 터덜터덜 임대아파트 정문 밖으로 걸어 나왔다. 정문 옆 목련나무가 가로등 불빛에 훤히 제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 보였다. 목련꽃은 빨리 지기도 하지. 어느새 꽃잎들은 하얀 빛깔을 잃고 젖은 수건처럼, 말린 가지처럼 축축 늘어져 있었다. 그는 마을버스 정거장 쪽으로 걸어가다가 문득 지갑을 갖고 나오지 않은 것을 깨달았다. 주머니엔 신용카드 한 장과 영수증 한 장이 전부였다. 그의 신용카드는 교통카드 기능이 따로 없었다. 오래전 발급받은 신용카드였기 때문이었다. 그는 다시 집으로 돌아가려고 하다가 옆에서 고개를 푹 숙인 채 걷고 있는 아들의 뒤통수를 보았다. 그냥 걸어가지, 뭐. 그는 마음속으로 그렇게 결정했다. 걸어가면 한 삼십 분쯤 걸리려나? 그는 괜스레 그것이 아들의 마음을 더 위하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아무 말 없이 마을버스 정거장 옆을 지나쳤다. 아들은 아무 말도 묻지 않고 그를 따라 걷기만 했다. 초등학교 4학년 아들의 양손엔 커다란 레고 박스가 들려 있었다. 시간은 밤 열 시를 넘어서고 있었다.

그는 어젯밤, 사소한 사고를 저지르고 말았다. 시내 변두리 한 물류센터에서 일하는 그는, 오랜만에 직장 동료들과 회식을 했고, 이른 회식이 끝난 후 조금 불콰해진 얼굴로 마을버스를 기다리다가 느닷없이, 거의 충동적으로, 바로 길 건너편에 있는 대형 마트 안으로 휘적휘적 걸어 들어갔다. 일주일 전이었던가, 아내와 아들과 장을 보러 나왔다가, 아들이 레고 코너 앞에 오랫동안 서 있던 것이 기억났다. 왜? 이거 갖고 싶니? 그는 장난스럽게 아들의 어깨를 퉁 치며 물었다. 그러곤 거의 동시에 아들이 보고 있던 레고 박스의 가격표를 바라보았다. 29만9000원. 그는 좀 당황했지만, 당황한 모습을 들키지 않으려고 일부러 두 다리에 힘을 주었다. 아들이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웃었다. 이건 거의 우리 집 한 달 월센데? 아들은 그러면서 퉁, 제 어깨로 그의 허리께를 부딪쳐왔다.

솔직히 그렇게 지나가버린 일인 줄 알았다. 그러니까 그 자신도 어젯밤, 자신의 행동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던 게 맞았다. 그는 그 레고 박스를 신용카드로 구입하면서도 어쩐 일인지 조금 화가 나 있었다. 머릿속에선 자꾸 반복, 반복, 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봄이 다시 돌아오고, 또 봄이 돌아오고, 자신의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그 또한 그렇게 버스를 타고 출퇴근을 할 것이고, 늘 집세와 생활비를 마련하느라 진땀을 뺄 것이며, 어쩌다가 봄 점퍼 한번 구입할 때마다 이것저것 많은 것을 고려할 테고, 그러다가 다시 어느 봄이 돌아오면 허망하게 몸이 아파오겠지…. 그는 계속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기껏 아들에게 레고 하나 사주면서 그런 생각을 반복하는 자신이 못 미더워, 그는 스스로에게 더 화를 냈다.

그는 사거리 신호등을 기다리다가 슬쩍 아들에게 말을 걸었다. 정후야, 우리 이거 바꾸지 말까? 그의 아들이 건너편 신호등을 바라보며 말을 받았다. 안 바꾸면? 집에 안 들어가려고? 그의 아내는 바로 오늘 저녁에서야 레고 박스의 정체를 눈치챘다. 2년 전부터 학습지 교사로 일하고 있는 그의 아내는, 함께 저녁식사를 하지 못할 때가 많았다. 한밤중, 잠에서 깨어보면 스타킹도 벗지 못한 아내가 침대 가장자리에 기절한 듯 잠들어 있곤 했다. 찜질방 같은 데 갈까? 거기서 자면 되지 뭐. 그의 아내는 레고 박스와 영수증을 그와 그의 아들에게 들려주며 당장 환불해 오라고 했다. 당신이 지금 정신이 있어, 없어? 당신이 애야? 아내는 그렇게 말했다. 아빠는 찜질방에서 바로 출근해도 되지만, 나는 다시 집에 가서 책가방을 가져가야 해. 아들은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들은 횡단보도를 건너 걷기 시작했다. 정후야, 아빠 밉지? 그가 아들에게 물었다. 그러게, 왜 이런 걸 사왔어? 내가 언제 사달라고 했나…. 그는 아들의 발걸음 속도에 맞춰 걸었다. 그냥 너한테 사주고 싶었던 거지, 뭐…. 그의 아들은 말하지 않았다. 그래도 봄이라서 걸어가도 안 춥다, 그치? 그가 그렇게 말한 순간, 그의 아들이 훌쩍훌쩍 울기 시작했다. 뚝뚝, 눈물방울이 레고 박스 위로 떨어졌다. 아들은 레고 박스 위에 떨어진 눈물방울을 계속 훔쳐내며, 그러면서도 울음을 멈추지 않았다. 그는 당황해서 어쩔 줄 몰랐지만, 그러면서도 또 한편, 어쩐지 이 풍경 자체가 낯익어,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기만 했다. 그 또한 그렇게 울었던 봄밤이 있었다.

이기호 소설가
#다시 봄#소설#이기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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