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박중현]낡은 세차장 같은 한국경제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2월 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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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중현 소비자경제부장
박중현 소비자경제부장
‘실내 세차만 하는 차량 이용 금지.’

우리 동네 셀프세차장 입구에는 몇 해 전부터 이런 푯말이 세워져 있다. 세차시설을 이용하려면 반드시 차 바깥까지 세차해야 한다는 뜻이다. 조금 깊이 생각해보면 세차장 주인의 속내가 짐작된다. 셀프세차장의 주력시설은 고압 살수기, 비누거품 솔이 설치된 칸막이식 세차시설이다. 공간을 많이 차지할 뿐 아니라 수입도 주로 여기서 나온다. 500원짜리 동전을 잔뜩 바꿔 시작해도 금세 시간이 다 됐다는 ‘삐삐’ 소리에 쫓겨 서둘러 세차를 끝낸 경험을 떠올리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기계식 자동세차기를 설치한 주유소들이 늘면서 셀프세차장에서 차 외부를 닦는 고객이 크게 줄었다. 주유소에서 기름을 넣고 받은 무료 세차 티켓, 세차 할인권으로 세차하는 운전자가 많아졌기 때문이다. 시간과 품이 덜 든다는 게 자동세차의 장점이다. 그렇다 보니 실내에 먼지가 많이 쌓이거나, 발판이 더러워졌을 때에만 셀프세차장을 찾는다. 주력시설 이용자가 줄고 돈 안 되는 진공청소기, 발판청소기만 쓰는 고객이 많아지다 보니 세차장 주인이 고민 끝에 이런 푯말을 세운 것이다.

그의 판단은 현명했을까. 내 경우 내부청소를 꼭 해야 할 때 한두 번 필요치 않은 외부 세차까지 하며 이 세차장을 이용했다. 하지만 머잖아 주유소에서 자동세차하고 실내청소는 휴대용 진공청소기를 구입해 쓰는 쪽을 택했다. 세차장 주인의 의도와 상반된 결과다.

요즘 이 세차장을 지날 때마다 점점 더 쇠락하는 모습을 안타깝게 지켜보고 있다. 일찌감치 변화를 받아들여 외부세차 공간을 줄이고 대신 진공청소기를 늘려 내부 청소만 원하는 고객을 더 유치했으면 어땠을까. 또는 아예 다른 업종으로 전환했다면.

요즘 한국 산업계의 상황이 이 셀프세차장 같다. 1997년 외환위기를 맞아 대기업집단의 백화점식 업종 확대는 벽에 부닥쳤다. ‘빅딜’ 등 김대중 정부의 경제 관료들이 강압적, 자의적으로 추진한 산업 구조조정에는 부작용이 있었다. 하지만 그때 구조조정을 안 했으면 이후 한국 경제가 10년 후 찾아온 글로벌 금융위기 등을 견뎌내지 못했을 것이라는 게 경제 전문가들의 일반적인 평가다.

요즘 들어 20년 가까이 유지된 노후 산업구조가 우리 경제를 더 이상 지탱할 수 없다는 점이 분명해지고 있다. 포스코는 1968년 창립 이후 47년 만에 처음으로 지난해 적자를 냈다. 지난해 4분기(10∼12월)에 삼성전자는 세계 스마트폰 판매량 1위를 지켰지만 최대 시장인 중국에서는 화웨이, 샤오미 등에 뒤처지며 5위권 밖으로 밀려났다. 대형 마트 1위 업체 이마트는 소비침체에 일요일 의무휴무 규제, 메르스(MERS·중동호흡기증후군) 사태 등이 겹쳐 작년에 2년 연속 영업이익이 감소했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자는 법이 원샷법(기업활력제고특별법)이다. 기업이 생존을 위해 선제적, 자율적으로 인수합병(M&A) 등 구조조정에 나서면 정부가 사업 재편 절차, 규제를 줄여주는 내용이다. 재벌의 편법 승계를 조장한다는 우려에 이를 예방하는 내용도 포함됐다. 하지만 지난달 말 이 법을 통과시키기로 한 새누리당과 더불어민주당의 원내대표의 합의는 허무하게 파기됐다. 김종인 더민주당 비상대책위원장, 박영선 비대위원이 이른바 ‘경제 민주화’에 배치된다는 이유로 선거법 우선 처리를 주장한 탓이다.

이렇게 시간이 흐르는 동안 미래세대의 일자리를 만들기 위해 산업구조를 뜯어고칠 기회는 점점 줄어들고 있다. 낡은 세차장 주인 같은 정치인들의 판단 탓에 나중에 민주화할 경제나 남아날까 걱정이다.

박중현 소비자경제부장 sanjuc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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