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인 강국, 그 경쟁력의 뿌리를 찾아서]<1>핀란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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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5월 2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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핀란드… 어린이가 디자인 파워의 원천
“디자인 본능 몸으로 배워라” 어린이학교 열어 체험교육

헬싱키 어린이건축학교 ‘아르키’ 학생들이 부모와 함께 달 표면 주거단지 모형을 만들고 있다. 아들 삼포 군(6·오른쪽)과 함께 온 마리아 마살린 씨는 “놀이와 교육의 구분이 없는 이곳에서의 경험은 아이들이 건축과 디자인에 익숙한 사회인으로 성장하는 데 보탬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헬싱키 어린이건축학교 ‘아르키’ 학생들이 부모와 함께 달 표면 주거단지 모형을 만들고 있다. 아들 삼포 군(6·오른쪽)과 함께 온 마리아 마살린 씨는 “놀이와 교육의 구분이 없는 이곳에서의 경험은 아이들이 건축과 디자인에 익숙한 사회인으로 성장하는 데 보탬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디자인 경쟁력은 ‘디자인 마인드’에서 나온다. 주어진 대상의 디자인 가치를 판단하면서 더 나은 해법을 모색하는 디자인 마인드는 벼락치기 노력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어릴 때부터 자연스럽게 디자인 마인드를 본능처럼 심어주려 노력하는 선진국의 디자인 교육 현장을 소개하고, 한국의 디자인 교육이 나아갈 방향을 모색한다.》

핀란드 헬싱키 토페리우크센가(街)의 예술센터 ‘안난탈로’에는 9개의 화장실이 있다. 각각의 벽면에 사람, 새, 바다 등을 상징하는 타일공예품이 붙어 있어 방문자의 눈길을 끈다. 마무리는 조금 거칠지만 조잡한 구석이 없는 이 공예품은 7∼17세의 안난탈로 수강생 40명이 2년 전 도예디자이너 키르시 키비비르타 씨(50)와 3개월간 함께 만들어 설치한 것이다.

안난탈로는 1987년 헬싱키 시가 어린이와 청소년을 위해 세운 비정규 예술교육기관이다. 50여 명의 교사는 모두 현역 디자이너 또는 예술가. 아이들은 디자인을 ‘학습’하기보다는 디자이너와 더불어 진행하는 ‘작업’을 경험한다. 안난탈로의 화장실은 교실과 현장의 경계가 없는 핀란드 디자인의 특징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 체험하는 디자인

3월 27일 오전 안난탈로 지하 1층 교실. 10명의 학생이 둘러앉아 금속디자이너 안나 헤이노 씨(30)로부터 실톱으로 은판자를 재단하는 요령을 듣고 있었다. 라흐칸 종합학교 학생인 헨리크 본 마르텐스 군(17)은 “공예 강좌는 처음 듣는다”며 “소설을 읽다가 문득 은반지 만들기에 흥미가 생겨서 찾아왔다”고 했다. 6일간 진행하는 12시간의 수업에 참여한 학생들은 손수 디자인해 만든 은반지를 낄 수 있게 된다.

키비비르타 씨는 “아이들에게 자신의 상상과 생각을 세상에 표출할 수 있는 다양한 길을 알려주는 것이 모든 안난탈로 교육의 목표”라고 말했다. 다수의 프로 디자이너가 수업에 참여하지만 디자인 방법론이나 기능 교육은 주된 관심사가 아니다. 학생들은 디자인, 미술, 공예, 음악, 영화, 연극, 무용 등 다양한 예술 영역을 현장 직업인의 지도를 통해 원하는 만큼 체험할 수 있다. 에르자 메흐토 교장(55)은 “아이들을 디자이너나 예술가로 만드는 데 이곳의 교육이 도움이 되는지를 고민해 본 적은 한 번도 없다”고 말했다.

“시내의 모든 유치원과 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이 한 번 이상 이곳을 다녀갑니다. 핀란드에서는 디자이너와 예술가의 사회적 위상이 매우 높지만, 여기서 수업을 들은 학생이 나중에 그런 직업을 가질 가능성은 크지 않죠. 안난탈로의 가치는 헬싱키 시민이라면 누구나 어떤 직업을 가졌건 관계없이 예술과 디자인에 대한 기본 소양을 갖추도록 만드는 데 있습니다.”

○ 대화하는 디자인

3월 25일 오후 찾아간 탈르베르긴 거리의 어린이건축학교 ‘아르키’에서도 비슷한 광경을 볼 수 있었다. 이곳은 건축가 피흐라 메스카넨 씨가 어린이 공간디자인 교육을 취지로 1994년 설립한 사교육기관이다. 한 교실에 유아반 교사 욘네 키아블로 씨가 켜놓은 촛불을 중심으로 다섯 명의 4∼6세 아이들이 바닥에 둥그렇게 모여 앉아 있었다. 아이들은 눈을 휘둥그레 뜨고 각자 꿈에서 본 것에 대한 교사의 해석에 귀를 기울였다.

키아블로 씨는 “빛과 어둠에 대한 전통적 관념에 은연중 익숙해지도록 돕는 시간”이라고 설명했다. “핀란드에는 이 땅이 가진 독특한 자연환경으로부터 얻은 나름의 가치관이 있어요. 이 땅의 건축 디자인은 그런 근본적 가치 관념에 대한 이해에서 비롯합니다. 어렸을 때 사람과 땅에 대한 이해를 얻지 못하고서 어른이 된 다음 좋은 건축가가 되는 건 무리죠.”

다른 교실에서 지하철역 모델 만들기를 지도하고 있던 마리 자코나호 씨는 시내에 설계사무소를 가진 건축가다. 수요일과 토요일 저녁에 수업을 진행하는 그는 “여기서 하는 일은 교육이라기보다 ‘대화’에 가깝다”며 “컴퓨터나 건축주와 종일 씨름하다가 아이들을 만나면 적잖은 에너지를 얻는다”고 말했다.

○ 삶과 맞닿은 디자인

안난탈로와 자주 합동프로그램을 실시하는 코르키아붸렌 거리의 ‘디자인뮤제오(디자인 박물관)’도 헬싱키 디자인 교육의 한 축을 맡고 있다. 1873년 산업디자인 박물관으로 세워져 세계 각국에서 수집한 6만여 점의 전시품을 보유하고 있다. 해마다 2만여 명의 관람객이 이곳을 찾는다.

단체관람을 온 어린이와 학생들은 나란히 줄을 서서 유리진열장을 들여다보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전시대 하단 서랍마다 관람객이 만져볼 수 있는 전시품 관련 샘플이 들어 있다. 의류 전시실 서랍에는 옷감, 유리공예품 아래에는 형틀 뜨는 모래판을 넣어뒀다. 교육담당 큐레이터 리이나 스빈후풰드 씨는 “전시물의 제조 방법과 쓰임새를 살피면서 집에서 흔히 보던 물건이 박물관에 전시된 이유를 깨닫도록 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운영 예산 50%를 시로부터 지원받는 디자인박물관은 현업 디자이너 특강을 1년에 30여 차례 연다. 보석 디자인이 주제라면 ‘모양새’보다는 착용 방법, 쓰임새에 관한 토론에 집중한다. 마케팅과 타깃 고객 공략법 등 디자이너의 실제 작업 과정을 이해할 수 있게 돕는 것이다. 스빈후풰드 씨는 “핀란드 건축가 알바 알토의 디자인이 세계의 주목을 받은 것은 뛰어난 실용성 덕분”이라며 “우리는 다음 세대에 디자인을 가르치려 하는 것이 아니라 삶에서 디자인을 어떻게 이용할 것인지 귀띔해주려 한다”고 말했다.

▼ “주거단지 가운데에 운하를…” 어린이가 낸 아이디어 채택 ▼

핀란드 헬싱키의 어린이건축학교 아르키 학생들이 만든 도시 남서부 해안지대 헤르네사리의 주거지역 개발계획 모형. 헬싱키 시는 실제 계획에 아이들의 의견을 반영해 녹지와 수변공간을 확장했다. 사진 제공 아르키
핀란드 헬싱키의 어린이건축학교 아르키 학생들이 만든 도시 남서부 해안지대 헤르네사리의 주거지역 개발계획 모형. 헬싱키 시는 실제 계획에 아이들의 의견을 반영해 녹지와 수변공간을 확장했다. 사진 제공 아르키
어린이가 실물 건축디자인에 참여할 수 있을까.

핀란드에서는 가능하다. 헬싱키 어린이건축학교 아르키의 중앙 홀 벽에는 학생들이 만든 조형물과 건축물 모델, 프로젝트 패널이 진열돼 있다. 그 가운데 헬싱키 시가 서남부 해안지대 헤르네사리에서 진행 중인 주거지역 개발 프로젝트가 눈에 띄었다. 시 당국은 2006년 32만 m² 규모의 이 프로젝트 설계자를 심사하는 과정에 시민 대표단과 아르키 학생들을 참여시켰다. 항만으로 쓰던 지역을 주거지로 전환하는 계획안에 3∼17세 아르키 학생 100여 명의 목소리가 부분적으로 반영됐다.

자코 헤이킨헤이모 군(15)은 “다닥다닥 붙여서 세울 낮은 건물들에 4000여 명의 사람이 들어가 살아야 한다니 공원과 물이 좀 더 넉넉해야 할 것”이라며 “마을 한가운데로 물이 지나가게 만들면 좋겠다”는 의견을 냈다. 현재 세부안을 조정 중인 기본계획안에서 헤이킨헤이모 군의 의견을 반영한 운하를 확인할 수 있다. 비스듬히 꺾인 운하에 떠 있는 듯 보이는 건물 디자인도 아이들의 아이디어다.

계획안 설계에 참여한 건축가인 니이나 훔멜린 씨는 “실험적 시도였는데 성인 건축가들이 무척 놀라워했다”며 “아이들의 의견이 모두 쓸모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일부를 채택해 실제 계획에 반영한 사실은 핀란드 디자인 정책의 유연성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도시디자인의 핵심은 절제 자연과 공존해야”
■ 산업디자이너 카훼넨 씨


핀란드 헬싱키 중심부의 투웰뤤 호수는 녹지 경관을 즐기려는 시민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명소다. 그런데 이곳에선 아무리 호숫가를 돌고 돌아 걸어도 쉴 만한 카페를 만나기 어렵다. 호숫가 오페라하우스 건물 내 카페 말고는 딱 한 곳뿐인데 그나마 여름에만 문을 여는 노천카페다.

홍익대 산업디자인과를 졸업하고 헬싱키디자인예술대에서 석사과정을 이수 중인 이승호 씨(31)는 “카페 난립을 막을 수 있었던 것은 핀란드 건축가들이 주축이 돼 관련 규제를 만들었기 때문”이라며 “자연과 도시가 공존하도록 하는 제도와 시스템이 핀란드 공공디자인의 핵심”이라고 말했다.

이 씨의 소개로 헬싱키 시내의 전차와 버스, 보행자용 교각 등을 만든 산업디자이너 한누 카훼넨 씨(62·사진)를 3월 26일 오후 퀘이덴푸노얀 거리의 작업실에서 만났다. 크리디자인(CreaDesign) 대표인 그는 “좋은 도시 디자인은 스스로를 과하게 드러내지 않고 절제하는 디자인”이라며 “내 디자인은 그것이 포함될 풍경 전체를 상상하는 작업에서 시작한다”고 말했다.

헬싱키의 공공디자인은 발랄한 느낌이 덜하지만 지루해 보이지도 않는다. 자물쇠 같은 사소한 생활용품부터 거리의 쓰레기통, 교통수단 등 공공시설에 이르는 폭넓은 영역을 오간 카훼넨 대표도 자신의 디자인에서 늘 군더더기를 덜어내고 필요한 요소만 효율적으로 배치하려 애쓴다.

“형태에 대한 욕심을 버리면 쓸모 있게 오래 사랑받는 디자인이 자연스럽게 떠오르기 마련입니다. ‘있어야 할 것’이 ‘있어야 할 곳’에 있으면 대개 눈에 잘 띄지 않죠. 버스나 전차, 정류장이 화려한 디자인으로 행인의 눈길을 붙잡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합판을 차곡차곡 쌓은 뒤 깔끔히 썰어내듯 만든 그릇, 과일상자를 반으로 잘라낸 뒤 이어 붙여 만든 의자, 장식 없이 ‘ㄷ’자로 매끈하게 다듬어낸 벤치 등 그의 디자인은 한결같이 재료의 자연스러운 특성을 있는 그대로 드러냈다.

“핀란드의 자연은 햇빛 눈부신 청명한 날씨를 1년에 단 3개월만 허락했습니다. 물론 그 3개월이 긴 겨울의 우울함을 넉넉히 보상할 만큼 아름답긴 하지만요. 자연과 공존하려는 핀란드 공공디자인의 열망은 제한적인 자연의 혜택에 대한 오랜 깨달음에서 비롯했을 겁니다.”

글·사진 헬싱키(핀란드)=손택균 기자 soh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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