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예술]사랑잃은 생명에 사랑 불어넣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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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09년 10월 3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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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년간 입양될 아이 돌본 소아과의사의 의료일기

◇할머니 의사 청진기를 놓다/조병국 지음/320쪽·1만2000원·삼성출판사

1970년대 초 서울시립아동병원. 병원 의료진이 가장 예뻐하던 영희가 아프다. 설사, 구토에 물 한 모금도 빨지 못했다. 생후 석 달도 되지 않아 이마에 링거를 꽂았다. 피부가 벗겨지고 온몸에 진물까지 흘렀다. 원인을 알 수 없어서 사망진단서를 준비하는 것밖에 할 수가 없었다.

간호사들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곶감 달인 물을 먹였다. 거짓말처럼 설사가 멎고 기운을 차렸다. 아이는 두 달 뒤 위탁모에게 맡겨진 뒤 돌이 지나 해외 입양됐다. 지금 아이는 서른 살이 넘었을 것이다.

저자는 75세까지 진료한 소아과 의사다. 1958∼2008년 50년간 서울시립어린이병원과 홀트아동복지회 부속의원에서 입양될 아이들을 돌봤다. 이 책은 그가 만났던 아이들에 대한 의료일기다. 가난했던 시절 부모 사랑을 잃은 아이들의 사연과 의사로서 겪었던 환희와 좌절을 담았다.

다섯 살 기원이는 네 번이나 파양당했다. 여자아이처럼 예쁘게 생긴 기원이가 파양당한 이유를 저자는 다섯 번째 엄마의 하소연을 듣고서야 알았다. 기원이가 다섯 번째 엄마 집에 간 첫날 이불 위에 똥을 눴다. 파양이 반복되면서 누구도 그 아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엄마는 기원이의 이유 있는 반항을 사랑으로 감쌌다. 어떠한 떼를 써도 받아주고 안아줬다. 7개월이 지나자 기원이는 엄마 목을 감고 꼭 끌어안았다.

해외 입양됐던 아이가 다시 찾아올 때가 저자는 가장 기뻤다고 말한다. 뇌성마비였던 영수는 아홉 살 때 보육원에 맡겨졌다. 양부모를 찾기 쉽지 않을 것 같았는데 미국에 입양돼 의사가 됐다. 한국을 다시 찾았을 때 만난 자원봉사자와 결혼해 가정을 꾸렸지만 부인은 아이를 가질 수 없었다. 영수는 받은 사랑을 갚아야 한다며 조국의 아이를 입양했다. 그런데 몇 년 뒤 아이가 생겼다. 영수는 저자의 이름을 따 아이의 이름을 병국이라고 지었다.

저자는 아이를 입양 보낸 엄마의 사연도 소개한다. 미혼모 도숙 씨는 아들을 미국으로 보냈다. 20년이 흘러 도숙 씨는 아들이 엄마를 찾는다는 전보를 받았다. 백혈병 때문에 골수이식이 필요하다는 소식과 함께였다. 도숙 씨와 아들은 골수가 맞지 않았지만 수술을 강행했다. 수술은 성공적이었다. 도숙 씨는 얼마 전 좋은 사람을 만나 결혼했다. 미국에 있는 아들도 생모의 결혼을 축하하려고 고국을 찾았다.

속절없이 아이를 떠나보낼 때 저자는 힘들었다고 고백한다. 태희는 여자 속바지에 싸여 병원에 버려졌다. 탯줄과 태반을 그대로 달고 있었다. 체온이 떨어진 위급한 상태였다. 회복해 입양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심장 기형이 발견됐다. 국내서는 수술이 불가능했다. 미국에서 입양 제의가 왔다. 미국행 비행기 안에서 아이는 배가 불러오고 입술이 파래졌다. 도착하자마자 수술을 받았다. 두 달 뒤 아이가 죽었다는 소식이 왔다. 저자는 탯줄을 단 채 병원에 오는 아이들에게 태희란 이름을 또 붙였다. 이번 태희는 오래 살기를 바랐다.

저자는 정년을 15년이나 넘겨가면서 아이를 진료했다. 그는 “박봉인 자리라 후임을 구하는 데 애를 먹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여기가 세상의 끝인가 싶을 때 누군가 내미는 따뜻한 손이 큰 힘이 된다는 걸 안다면 세상살이가 조금은 녹록할 것”이라고 말한다.

민병선 기자 bluedo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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