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예술]“아, 미당의 그 냉혹한 차별…”

  • 입력 2009년 10월 10일 02시 5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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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홀한 글감옥/조정래 지음/420쪽·1만2000원·시사인북

조정래씨 독자질문 84개 추려 자전 에세이 엮어

물방울무늬 플레어스커트에 흰 하이힐, 긴 머리에 하얀 얼굴…. ‘태백산맥’의 소설가 조정래 씨는 부인 김초혜 시인을 동국대 캠퍼스에서 처음 만났을 때의 모습을 상세하게 기억한다. 대학생 때 만난 김 시인은 이미 등단한 시인이었던 데 반해 조 작가는 가난한 문청에 불과했다. 호시탐탐 주변을 맴도는 쟁쟁한 이들을 물리치고 그는 어떻게 김 시인을 사로잡았을까.

조정래 작가의 ‘황홀한 글감옥’은 작가가 젊은 독자 250명에게서 받은 질문 500여 개 중 84개를 추려내 이에 답하는 형식으로 꾸민 자전 에세이다. 그는 “강연을 통해서는 다 이야기할 수 없었던 독자들의 궁금증에 답하고 작가생활 40년을 정리하기 위해 썼다”며 “생의 마지막 유언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으로 자식에게도 하지 못했던 이야기를 다 적었다”고 고백했다. 작가의 생애와 문학관, 젊은 세대에게 주는 금언 등이 다양하게 수록됐다.

‘공처가’라는 주변의 놀림에 ‘경(驚)처가’라고 응수하는 것으로 알려진 작가는 유머러스하게 지난 에피소드를 털어놓는다. 뭔가를 빌리고, 그것을 돌려준다는 명목으로 다시 만나는 고전적인 방법으로 말문을 튼 그는 겨울방학 내내 섬세하게 그린 링컨의 초상화를 선물함으로써 김 시인의 마음을 얻는다.

하지만 결혼한 뒤에도 등단하기까진 5년을 더 기다려야 했다. 그 기간에 발생한 굴욕적인 해프닝들은 웃음을 자아낸다. 부부가 함께 서정주 시인 댁에 인사하러 갔을 때 선생은 문인들을 향해 “여기는 장래가 아주 촉망되는 여류시인 김초혜 씨, 그리고 옆은 남편인 문청 조정래 군”이라고 소개했다. 작가는 “서정주 선생의 그 냉혹한 차별은 얼마나 큰 수모입니까”라며 그 시절을 회상했다.

이 책을 통해 처음 공개되는 일화들도 있다. ‘태백산맥’ 출간 뒤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고발됐던 작가는 차기작 ‘아리랑’ 취재를 위해 중국에 가야 했지만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를 두고 내사 중이란 이유로 안기부에서 가로막는다. 작품을 포기해야 하는 암담함에 휩싸여 있을 때, 이어령 당시 문화부 장관의 도움으로 무사히 출국 허가를 받을 수 있었다. 작가는 “글을 쓰는 일은 온 몸을 쥐어짜는 것 같이 피를 말리는 일이지만 그 성취감은 온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은 만족감”이라며 “지난 글쓰기 인생이야말로 ‘황홀한 글감옥’이었다”고 말했다.

박선희 기자 teller@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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