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눈/니컬러스 크리스토프]바이러스에 노출된 美의료제도

  • 입력 2009년 5월 5일 02시 56분


신종 인플루엔자A가 전 세계로 확산되고 있는 가운데 미국에서는 취약한 의료시스템이 새로운 정치적 쟁점으로 떠오르고 있다. 조지프 바이든 부통령은 얼마 전 버락 오바마 대통령 취임 100일을 기념하는 자리에서 “가장 시급한 문제는 의료시스템 개혁”이라고 말했다.

수개월 전 오바마 대통령이 유행성독감에 효율적으로 대처하기 위한 의료시스템 개혁에 재정 투입이 필요하다고 주장했지만 칼 로브 전 백악관 부실장이나 수전 콜린스 상원의원은 ‘하찮은 짓’으로 치부해버렸다. 이런 점에서 공화당 사람들은 신용을 잃었다고 할 만하다.

하지만 이번 사태는 미국 사회가 허술한 의료시스템으로 인해 유행성독감과 같은 대유행병에 매우 취약한 국가라는 점을 새삼 일깨워주고 있다. 캘리포니아간호사협회와 전미 간호사조직위원회 공동의장을 맡고 있는 데버러 버거는 “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SARS·사스)과 조류인플루엔자(AI), 신종 인플루엔자와 같은 유행병이 끊이지 않고 창궐하는 것은 미국 사회가 의료안전망을 복원하지 않을 경우 대재앙을 겪을 수밖에 없음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지적했다.

미국에는 현재 의료보험에 가입하지 못한 사람이 4700만 명에 이른다. 이들은 인플루엔자 백신 접종은 물론 응급상황이 났을 때 신속한 보호를 받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먹고살기 힘든 사람이 많아 아프다고 집에 마냥 누워 있을 형편도 못된다. 이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병으로 죽거나 바이러스를 사회 곳곳에 퍼 나르는 일이다. 컬럼비아대의 전미 재해예방센터의 어윈 레들레너 사무국장은 이들을 “4700만 명의 ‘장티푸스 메리’(대규모로 바이러스를 옮기는 사람을 뜻하는 관용구)”라고 지적한 바 있다. 그는 “제 기능을 못하는 의료시스템, 수많은 의료보험 미가입자, 혹독한 경기침체, 능력 이상의 환자 치료로 과부하가 걸린 병원, 새로운 치명적 바이러스의 지속적인 출현 등은 치명적 결과를 초래할 수 있는 조합들”이라고 경고했다.

최첨단 의료기술에 관한 한 미국은 매우 앞서 있다. 미국의 최상위 5개 병원은 전체 유럽 국가들보다 많은 임상시험을 진행 중이다. 그러나 전반적인 미국 의료수준은 절망적이다. 세계보건기구(WHO) 통계에 따르면 미국인 평균수명은 그리스보다 짧다. 5세 이전 영유아 사망률은 포르투갈의 두 배 이상이고 임신 여성 사망률 역시 아일랜드의 11배에 이른다. 유럽 국가와 비교해 형편없는 미국의 의료 통계를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화가 치밀 지경이다.

더 큰 문제는 미국 의료계가 컴퓨터단층촬영(CT) 같은 첨단 의료 부문에는 지나칠 정도로 투자하면서 공중보건에는 소홀하다는 점이다. 미국 병원들은 대유행병에 대처할 병상과 의료진 모두 태부족이다. 연구조사에 따르면 미국에서 심각한 유행성독감이 창궐하면 1000만 명이 입원하는 상황이 올 수도 있지만 현재 미국 병원들의 전체 수용 규모는 100만 병상에 불과하다. 게다가 3분의 2는 이미 환자들로 차 있다. 신종 인플루엔자가 현재까지는 그리 심각한 증상을 보이고 있지 않지만 나중에 치명적인 인플루엔자로 돌변할지 아무도 모른다. 1918년 유행성독감이 처음 발병했을 때 초기에는 사망자가 거의 없었지만 그로부터 3개월 후 변종 바이러스가 생겨 전 세계에서 수천만 명의 목숨을 앗아간 것처럼 말이다.

우리는 다만 예방적 조치가 필요하다는 것만은 알고 있다. 그 예방적 조치는 단지 손을 비누로 깨끗이 씻는 것이 아니라 대대적인 의료시스템 개혁이어야 한다. 심각한 대유행병이 발병하면 우리는 수십 년이 지나도록 합리적인 의료시스템을 만들지 못한 데에 어마어마한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다.

니컬러스 크리스토프 뉴욕타임스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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