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과 삶]한승원/초가을, 우주로 귀가 열린다

  • 입력 2004년 8월 23일 19시 0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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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가을로 접어들면서 키가 한 치쯤 더 커진 듯하고 십년쯤 젊어진 듯싶다. 오전 7시에 산책을 가다가 보니 연못의 자수련 꽃이 오므라져 있다. 아니 저것들이 왜 아직도 저러고 있을까. 아 그렇다. 반소매 옷 입은 내 팔뚝이 차가운 바람에 선뜩거렸고 소름이 돋아 있었다. 저것들이 초가을을 나보다 더 먼저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자수련 꽃은 한여름에는 정확하게 오전 6시반쯤부터 벌어져 오후 3시쯤부터는 꽃잎을 오므리고 잠을 잔다. 그것들은 생체시계를 내장한 듯싶게 시간을 제대로 맞추어 피고 오므린다. 그런데 그 시계는 해의 움직임보다는 온도에 더 민감하다. 날씨가 싸늘해지면 꽃잎이 벌어지는 시각은 오전 8시쯤으로, 오므라지는 시각은 오후 4시쯤으로 늦어진다.

풀벌레 울음도 온도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간밤에 불을 끄고 자리에 누운 채 풀벌레 소리를 감상했다. 토굴이 산 밑에 있는데다 뒤란에 대밭이 있고 마당에 잔디가 깔려 있고 양옆에 밭이 있으므로 풀벌레들이 유난히 많을 수밖에.

나는 아름답고 고운 소리로 노래하는 풀벌레들의 이름을 기껏 귀뚜라미 여치 베짱이 정도밖에 모른다. 한데 소리의 무늬나 결이나 색깔을 따지고 가리면서 들어보니 무려 열 몇 그룹은 되는 듯싶었다. ‘시리링시리링’ 우는 놈, ‘키올롱키올롱’ 우는 놈, ‘하이용하이용’ 우는 놈, ‘두우얏두우얏’ 하고 작은 새처럼 우는 놈, ‘키리리키리리’ 우는 놈….

한동안 그 연주를 듣다 보니 내 이명(耳鳴)이 그 소리를 더욱 아름답고 곱게 만들고 있다. 그들의 음악은 내 이명과 더불어 태극으로 가고 있었다. 태극은 우주의 시원(始原)과 맞닿아 있는 그윽한 시공(時空)으로 흘러가고 있을 터이다. 별이 빛나는 것이 아니고 사실은 내 눈빛이 그 별을 빛나게 한 것이다. 그렇다면 내 감각이 삽상한 초가을을 만들고 그것을 즐기고 있는 것이다.

인생은 자기 이름을 의미 있게 만들어서 그 이름에 주어진 값만큼 우주를 누르고 삶을 즐기며 살아가기다. 원효 스님의 어린 시절 이름은 서당(誓幢), 혹은 시단(始旦)이라고 전해진다. 그것은 새벽이다. 어른이 되어 스스로의 이름을 원효(元曉)라고 지었다. 첫새벽 혹은 꼭두새벽이다. 세상의 새벽을 여는 사람이 되고 싶었던 것이다.

한 제자가 e메일로 보내온 홍련 사진을 보며 생각했다. 원효에게 요석공주는 무엇이었을까. 세상에 연꽃보다 더 색정적인 꽃이 있을까. 연꽃보다 더 성스러운 꽃이 있을까. 한쪽으로 치우쳐 읽는 것은 죄다. 둘이 아니라 한데에 어우러진 구경(究竟)을 읽어야 한다.

누구에게나 그런 연꽃 같은 사람은 있었을 터이다. 사진 옆에 미당의 시 ‘연꽃 만나고 가는 바람 같이’가 쓰여 있다. 이별인 듯하지만 사실은 다음 생에서의 만남에 대한 노래다. 나도 그 꽃잎 표면을 다녀가는 바람이다. 원효도 요석공주를 다녀간 바람이었다. 아니,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 가운데 이 세상을 다녀가는 바람 아닌 것이 있으랴.

초가을은 낙엽을 준비한다. 이별을 준비하고 다음 세상에서의 더 뜨거운 만남을 준비한다. 단풍든 잎사귀들은 떨어지고 이름만 남는다. 언젠가는 그 이름을 기억해 주는 사람들마저 사라진다. 그 그림자와 이미지만 남아 구름처럼 흘러간다. 견고한 사각형에 갇혀 살지 말고 오각형처럼 자유자재의 구멍을 뚫어놓고 살 일이다.

한승원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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