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김순덕 칼럼]‘너 죽고 나 죽자’의 사회학

  • 동아일보
  • 입력 2004년 3월 12일 18시 09분


이럴 줄은 몰랐다.
대저 싸움이란 것은 “너 나이가 몇이냐” “왜 아까부터 반말이냐”의 감정문제로 번지는 순간 왜 다투게 됐는지는 뒷전에 밀리고, 성질이 불뚝 같거나 좀 밀린다 싶은 쪽에서 “너 죽고 나 죽자”며 상대의 멱살이든 머리채든 잡아챌 적엔 이미 종국으로 치닫기 십상이다. 이 즈음이면 둘을 잘 아는 중재자나 하다못해 지나가던 행인이라도 나서서 뜯어말리기 시작하고, 아무리 너 죽고 나 죽자고 했어도 설마 죽기야 하겠느냐는, 또는 죽기로 기를 씀으로써 결국은 살겠다는 심리가 작용해 양쪽 다 못 이기는 척 싸움을 그치는 게 보통이다.
이번엔 아니었다. 김수환 추기경이 쓴소리 했다가 되레 곤욕을 치르는 형편이고 보면 어떤 중재도 먹혀들 수 없게 돼 있었다. 구경꾼도 두 패로 갈려 싸우는 판이다. 잘잘못 따져봤자 소용없다. 잘못하다간 정말 너 죽고 나 죽게 생겼다.
▼증오의 정치, 인간본성인가 ▼
헌정사상 초유의 대통령 탄핵 가결로 상황 끝이라면 차라리 나으련만 혼란은 쉽게 가라앉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정치권이야 싸우는 게 직업인지라 앞으로 좀 더 세게 싸우면 그만이겠지만 나라가 두 쪽으로 갈릴 조짐이 나오니 문제다. 만일 경제까지 곤두박질친다면 대통령에 대한 호오(好惡)를 기준으로 갈린 내 편과 네 편은 ‘너 때문에 이 꼴 됐다’는 분노와 증오, 집단 히스테리를 몰고 올지 모른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이런 ‘증오의 정치’가 우리나라만의 현상은 아니라는 점이다.
대선을 앞둔 미국에선 조지 W 부시 대통령만 아니라면 누구라도 좋다는 ‘부시 때리기’가 유행이다. 유럽에선 실업과 경기부진을 유대인과 이민자 탓으로 모는 인종주의 망령이 되살아났다. 기독교와 이슬람 극단주의자간 문명의 충돌도, 세계화와 반(反)세계화주의자의 문화전쟁도 갈수록 극렬해진다. 공산주의가 종언을 고하면 지구평화가 찾아오리라 믿었건만 감정의 양극화 극단화 현상은 잘사는 나라나 못사는 나라나 마찬가지다.
증오 정치의 1차 생산자는 정치인으로 봐야 한다. 적이 있어야 책임을 회피하고 자신을 중심으로 총화단결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냉전시대엔 공산주의가 적이었다. 소련이 무너진 지금은 다른 적이 필요하다. 테러리스트든 이민자든, 내 밥그릇을 가로채는 어떤 것도 적이 될 수 있다. 북한이 주적개념에서 사라진 우리나라에선 ‘좋은 학교 나오시고 크게 성공하신’ 기득권층이 그 자리로 몰려 버렸다.
이 같은 정치인의 음모를 꿰뚫어보면 좋겠지만 불행히도 인간은 이성보다 감정이 앞서는 동물이다. 눈앞의 손실과 이익에 매달리고 고집과 편견에 사로잡히며 실속 없이 명예와 복수에 집착하는 게 보통이라고 사회생물학자들이 결론내린 지 오래다. 특히 투표는 물론 중요한 국가정책결정 같은 정치적 행위는 이성 아닌 애착과 본능과 습관에 좌우된다고 영국의 정치학자 그레이엄 월러스는 지적했었다.
극단은 극단을 낳는다. 지극히 집단적이면서 모든 관계를 가족관계로 바꿔 생각하는 단일민족 대한민국이다. 남자다움과 화끈함이 자랑이고 다른 것을 틀린 것이라고 여기는 나라다. 작은 마찰이 더 큰 분노와 증오로 확대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여기에 대통령부터 법을 무시하니 믿을 건 목청과 폭력밖에 없었다. 이 폭발적 에너지를 생산적인 데 쓰지 못하는 게 한스럽다.
▼‘왜’를 물으면 달라질 수 있다 ▼
어차피 여기까지 왔다. ‘막가는’ 창과 ‘배째라’ 방패를 부딪쳐봤자 누구에게도 득이 되지 않는다는 걸 안 것이 교훈이라면 교훈이다. 진짜 너 죽고 나 죽을 것인지, 살 궁리를 할 것인지 이제 선택을 해야 한다. 정치인이든 아니든 궁극적 목적은 누구나 같다. 좀 더 잘살아보자는 거다. 갈등은 수단을 둘러싸고 격돌한다.
하지만 목청과 주먹을 올리기 전 잠깐 ‘왜 그러는데?’를 물어 보면 감정 대신 이성이 들어갈 틈이 생긴다. 게으르지만 신중한 이성은 긴 안목으로 행위에 대한 효과와 이해를 따지라고 일러준다. 지금으로선 이를 악물고 법과 절차를 따르는 것이 최선이다. 추락 위기의 우리에겐 분노와 증오에서 허우적댈 여유가 없다.
김순덕 논설위원 yur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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