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프리즘]송호근/권위주의가 그립다?

  • 입력 2001년 11월 13일 18시 28분


김대중 대통령이 민주당 총재직을 사임했다. 차라리 벗어 던졌다고 하는 편이 적절하다. 민주당은 이제 아비 없는 아이가 되었는데, 혹자는 자립의 조건이 드디어 만들어졌다고도 할 것이다. 그러나 자립이라고 하기에는 갈 길이 험난하다. 총재와 대선후보를 선출한 후에도 카리스마가 사라진 자리의 허전함을 무엇인가로 메워야 하기 때문이다. 나는 김 대통령만은 전 정권의 전철을 밟지 않는 예외이기를 바랐다. 그러나 지체된 개혁정치, 지리멸렬한 개혁세력, 집권당의 내분과 허약함 등은 기존의 정권과 다를 바가 없음을 말해준다. 여기에 권력승계 문제로 인해 쫓기다시피 총재직을 버렸던 기존의 대통령들과 어찌 그리 같은 길을 가고 있는지, 그렇다면 탈 없는 퇴진은 가능하기나 할는지 걱정이다. 집권보다 ‘명예로운 퇴진’이 더 어려운 것이 한국의 정치 현실이고 보면 앞으로 1년 동안 국민이 목격해야 할지도 모를 험한 꼴들 때문에 더럭 겁이 나기까지 한다.

▼DJ-과거정권 닮은 꼴▼

두 민선정부가 우리에게 심어준 민주주의는 ‘시끄럽고’ ‘번거로우며’ 무엇인가 계속 ‘칭얼대는’ 이미지다. 깔끔하고 흔쾌하게 일이 처리되고, 신사답게 경쟁하고 물러나는 산뜻한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권위주의를 자주 그리워한다. 좀 더 나은 민주주의를 향한 행보에 제동이 걸릴수록 권위주의에의 향수가 소록소록 자란다. 위험천만한 현상이지만 지금 한국의 정치 현실이 그렇다.

민주주의를 칭얼대는 이미지로 얼룩지게 하는 것은 무엇보다 권력승계의 문제이다. 집권당의 내분사태는 거룩한 명분을 들고 곧 터져 나올 신당 창당이나 합종연횡의 물결 속에서 자연스럽게 해소될 것이기에 그렇게 절박한 문제는 아니다. 그러나 권력승계는 차기 정권에서도 속을 썩일 고질적인 병폐이므로 이것만은 지혜롭게 제도화의 길을 터야 한다. 왜 이 문제가 이렇게 시끄러운가. 세 가지 요인이 그것을 설명한다.

첫째, 모든 권한이 대통령에게 집중되어 있다. 그것은 자주 개혁 정치의 파행을 낳는다. 각료나 집권당의 정책 채널은 제대로 작동되지 않는 반면, 대통령을 둘러싼 그룹의 비중이 커지는 것이다. 선거 참패와 지지도 하락의 책임을 동교동계로 상징되는 가신그룹에 전가하는 명분이기도 하다. 동교동계를 축출한다고 승계문제가 투명해지는 것은 아니다.

둘째, 권한 집중은 권력 분산을 통한 책임정치의 가능성을 봉쇄하며 후계자들이 정치력을 배양할 기회를 박탈한다. 그럴수록 후계자들은 국민의 관심을 끄는 말을 개발하는 데에 더 신경을 쓰며 국가의 대소사에 쓸데없이 개입한다.

셋째, 후계자는 당의 대의원 선거로 선출된다. 우리는 대의원이 어떤 사람인지 모르지만 후계자들에게는 국가정책보다도 이들이 더 중요하다. 개인적 네트워크와 연고를 최대한 활용하여 이들의 지지를 얻으면 그만이다. 분파와 지지자들을 관리하는 데에는 막대한 비용이 들며 때로는 정치적 흥정이 오고 간다. 정치적 부패는 이미 분파 관리와 더불어 시작되는데 혹시 대권을 잡으면 지켜야할 은밀한 약속이 인사의 난맥상으로 발전한다.

이것을 돌파하고 나면 같은 경로가 당선자를 기다린다. 5년 단임제는 통치자로 하여금 숨을 가쁘게 해서 능력 밖의 계획을 남발하도록 만든다. 비전과 능력의 격차라는 개혁정치의 덫을 우회할 여유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는 짧은 동안의 권력 행사와 개혁정치를 외치다가 이전의 통치자가 밟았던 ‘가지 말아야 할 길’로 할 수 없이 접어드는 것이다.

▼후계자에 국정참여 기회를▼

후계자를 선출하고 대선을 치르고 다시 개혁정치의 고삐를 조이는 데에 일년의 세월이 소요된다면 예삿일이 아니다. 권력 공백이 발생하는 일년 동안 그나마 일궈 놓은 개혁 성과들이 원상 복귀하거나 성장을 멈춘다면 말이다. 이런 낭비를 반복하지 않으려면 두 가지가 급선무다. 집권 초기부터 후계자들에게 국정 참여의 기회를 열어주어야 한다. 개혁정치의 일부분이라도 맡겨서 경험을 쌓게 하거나 능력 검증의 기회로 삼아야 한다. 5년 단임제의 근본적 재고와 대통령에 집중된 권한을 정당에 분산시키는 것도 정당정치의 활성화와 후계자문제 해결에 반드시 필요한 조치다.

송호근(서울대 교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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