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프리즘]차병직/인권이 짓밟힌다

  • 입력 2001년 11월 6일 18시 30분


지방 교도소 수감자로부터 한 통의 편지가 왔다. 감옥에서 당한 억울한 사정을 호소하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대형봉투 안팎에 군데군데 매직으로 글씨를 지운 자국이 있었다. 그래도 보낸 이가 나름대로의 울분을 손가락 끝에 실어 꾹꾹 눌러 쓴 탓에, 형광등 불빛만으로도 지워진 글씨가 되살아났다. 편지는 본인 외에 ‘인권운동 사랑방’ 서준식 전 대표와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의 김보영 간사에게 공동으로 보내는 것이었다. 하지만 서신검열 교도관은 두 사람의 이름을 낱낱이 뭉개어 재소자와 그들 사이의 통신의 자유를 침해하고 말았다. 추측건대 재야 인권운동가들이 편지를 읽게 되면 시끄러워질까 두려워서였을 게다. 그래도 변호사라는 세속적 간판 때문에 내 이름은 살아남았다. 고맙다. 편지를 받게 해줘서라기보다 말할 거리를 만들어줘서.

▼재소자-재외국민 무관심▼

한국인 신모씨가 마약범죄 혐의로 중국에서 사형집행을 당했는데도 우리 공관이 제대로 대처하지 못해 비난받고 있다. 이 사건은 사실 따지고 보면 우리 국가기관이나 공직자의 인권의식 부재가 초래한 당연한 결과다. 형식과 관행을 중시하는 관료들에게 개인의 권리는 부수적인 것으로 다루어지기 일쑤다. 지문날인을 거부한 재일동포에 대한 재판이 수년 동안 수십 회 열렸는데도 우리 공관에서 한 번이라도 가보았는지 확인해 보면 안다.

최근 몇 주 사이 보도된 사실만 보더라도 사정을 알 수 있다. 국가정보원은 변호인의 접견을 마음대로 제한한다. 절차와 방식에서 교묘하게 방해하는가 하면, 접견권 보장의 증거를 남기겠다며 사진촬영을 한다. 법원이 위법 선언을 해도 악습은 계속된다. 수사는 목적이고 피의자의 권리는 수단일 뿐이다.

검찰총장은 자신과 조직의 위기 모면에 급급한 나머지 국회의원의 면책특권에 반감을 보이며 마음대로 헌법상 권리를 제한하는 해석을 감행한다. 다른 쪽에선 검찰 간부가 특별검사제는 위헌이라며 케케묵은 고전적 권력분립이론을 든다. 수세를 만회하기 위해 내세운 최근 전략은 두 가지다. 하나는 경찰에서 이미 시행하고 있는, 피의자 수사 때 변호인을 참여시키겠다는 개혁안이다. 그것도 가장 중요한 초동수사는 제외한다는 단서를 붙였다. 다른 하나는 현실적 역공책으로, 검찰에 대한 비판을 상대로 집단적 명예훼손 소송을 제기하는 것이다.

법원의 판결도 마찬가지다. 국가기관인 검사의 권한 행사에 대한 비판의 허용 범위를 너무 좁혀 놓는다. 국가 권력에 의해 침해당한 개인의 권리는 수백만원으로 평가하고, 언론에 의해 침해당한 검사의 권리는 수천만원으로 값을 매긴다. 개인의 권리와 국가 이익 사이의 경계 획정을 애당초 잘못하고 있다는 느낌이다.

구속피고인이 법정에서 사복을 입게 된 사연은 어떠한가. 인권운동가와 변호사들은 오래 전부터 사복 착용을 주장했으나 외면당했다. 그러다 법무부 장관의 선심성 결정에 법원도 슬며시 따라가고 말았다. 인권에 대한 의식이 철저하지 못하다 보니 법관은 스스로에게 부여된 권한도 모르고 있었던 셈이다.

국회의원 154명이 사형제도 폐지법안을 제출하겠단다. 혁신적 조치처럼 내비친다. 절반을 넘긴 것도 희망적이다. 그러나 재적 3분의 2 이상이 서명한 부패방지법안이 4년 동안 표류했던 기억은 왜 떠오르는가. 국회의원들의 인권 의식이 그토록 진지하다면, 어떤 의미에서 사형제도보다 더 큰 폐해를 남기고 있는 국가보안법폐지안은 어디에 가 있는가.

▼정부-국회 인권개선 외면▼

국회의원들은 생명권같은 자유권뿐만 아니라 사회권 공부도 좀 해야 한다. 우리 헌법이 자본주의 자유시장경제 체제를 기본으로 하되 사회주의 이념을 수용하고 있다는 것을 안다면, 퇴영적 사회주의 색깔론으로 여론을 호도하는 것은 곤란하다.

인권에 대한 혼란과 모호함의 현실을 차근차근 정리할 수 있으리라 기대하는 것이 국가인권위원회다. 그러나 인권위원회도 출범 시한을 눈앞에 두고 행정자치부 등 기존 국가기관의 몰이해와 비협조에 부닥쳐 조직의 기틀조차 마련하지 못하고 있다. 인권위원장이 인식의 전환과 이해의 확산을 호소하며 다니는 모습이 안타깝다. 인권의 이름으로 배달된 봉투에서 함부로 지워진 이름들이 도처에 너무 많다.

차병직(변호사·참여연대 협동사무처장)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