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프리즘]서병훈/내가 신문을 좋아하는 이유

  • 입력 2001년 6월 26일 18시 31분


얼마 전 뜻 맞는 동료 교수들과 함께 성명서를 발표한 적이 있다. 성명서 문안을 컴퓨터에 입력해서 학교 전체 교수에게 이메일을 발송했다. 그러자 1분도 안돼, 여기 저기에서 전화가 걸려 왔다. 디지털 시대의 위력을 새삼 실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오래 전 몰래 숨어 성명서라고 쓰던 시절이 아련하게 회상되었다. 야심한 시각, 떠꺼머리 총각 몇이 모여 교회에서 빌려 온 등사기를 조심조심 밀었다. 그날 따라 바람은 왜 그리도 거세게 불었던지, 용트림하는 나무 가지 사이로 금새라도 기관원들의 발자국 소리가 들릴 것만 같았다. 가슴은 한없이 콩닥거렸다.

나는 이 추억을 그 무엇보다 소중하게 간직하며 살고 있다. 굳이 따지자면, 아날로그 시대에 대한 향수인 셈이다. 이웃의 땀 냄새를 함께 맡고, 그러면서도 밤하늘을 쳐다 볼 여유가 있어야 한다. 그래야 인간답게 살 수 있다. 컴퓨터로 상징되는 과학문명은 이것을 우습게 안다.

나는 휴대전화를 가지고 다니지 않는다. 휴대전화가 주는 편리함에 때로 귀가 솔깃해지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나는 앞으로도 가능하면 버텨볼 요량이다. 컴퓨터로 글쓰는 사람을 비웃으며 시대의 흐름을 거역하다 끝내는 장렬하게 산화 하고 만 전력이 있는 터라, 장담은 못하겠다. 그래도 휴대전화 없이도 살 수 있는 삶의 틀 속으로 스스로를 정좌시키고 싶은 생각만은 변함이 없다. 조금 덜 번잡하게 살고, 조금 더 부지런히 움직이면 될 것이다. 욕심을 줄이고 소박하나마 내 삶을 나의 의지대로 꾸려나가자. 그런 의지의 표상으로 휴대전화를 멀리 하고 있다.

인터넷도 마찬가지다. 손 끝 하나로 무수한 정보를 얻을 수 있으니 대단하기는 하다. 그러나 그렇게 얻어진 정보라는 것이 대개는 쓸 데가 없다.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정보의 홍수 앞에서 우리는 감격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내 평생에 좋은 책 하나 쓰는 것이 소원이다. 확언할 수 있는 것은, 그런 책일수록 인터넷과 담을 쌓은 채 연필로 꾹꾹 눌러 가며 쓸 때 가능해지지라는 점이다. 세상이 아무리 바뀌어도 결국은 내 마음이 관건이다. 부질없는 욕망으로 마음을 요사스럽게 만들고 정신을 혼미하게 만드는 것이라면, 결코 문명의 이기랄 것도 없다.

이런 이유에서 나는 활자 매체, 그 중에서도 특히 신문을 좋아한다. 달리 읽을 거리가 없던 초등학교 시절 처음 눈을 뜬 이래, 얼마나 많은 신문을 읽었는지 모른다. 내 파일 박스에는 여러 종류의 신문 기사가 주제별로 차곡차곡 스크랩돼 있다. 혼자 읽기 아까운 내용은 학생들과 아이들에게 강권하다시피 읽힌다.

신문에 관한 무용담 하나. 80년대 중반, 미국에서 유학할 때의 일이다. 박사과정을 마무리하는 중요한 시험을 치르게 되었다. 한참 답안을 써나가던 도중, 슬그머니 신문 생각이 났다. 고국에서 민주화의 싹이 보일까 말까 하던 무렵이니 오죽 볼 것이 많았겠는가. 정신없이 읽다 보니 두어 시간이 훌쩍 지나고 말았다. 일순 조바심이 치솟았다. 그러나 갈증을 해결하고 나서인지 정신은 한없이 맑았다. 덕분에 큰 무리 없이 시험을 마칠 수가 있었다.

뉴스가 궁금하면 인터넷에 들어가면 된다. 그러나 신문을 펴들고 기대에 찬 눈초리로 행간을 읽는 재미는 기대할 수가 없다. 기사를 읽다 말고 심호흡하는 여유라는 것은 TV가 흉내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나는 아침에 눈뜨면 제일 먼저 신문을 집으러 가는 일을 매일같이 반복한다. 신문이 없는 일요일이 짜증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나는 신문이 활자 매체의 중심에 서서 우리 사회를 올바르게 인도해주길 고대한다. 날이 갈수록 강퍅해지는 우리 심성을 순화하는 데 앞장 서주길 당부하고 싶다. 디지털 시대의 파상공세에 맞서 꿋꿋이 제 본령을 지켜주길 바란다. 이런 방향으로 신문이 개혁되길 충심으로 원한다.

그래서 작금에 벌어지는 사태에 대해 우려를 금치 못한다. 분명 언론개혁이라는 이름으로 진행되고 있지만, 그 끝이 무엇일지에 대해 확신이 서지 않는다. 신문에 대해서 얼마나 애정 어린 고민 끝에 이런 조치가 취해지고 있는지 알 수가 없다. 오늘날 신문이 처한 이 곤궁한 상황은 곧바로 부메랑이 되어 우리에게 되돌아 올 것이다. 진실로 걱정이다.

서병훈(숭실대 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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