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희 에세이/21세기 앞에서]「미국 재기」의 교훈

  • 입력 1997년 6월 23일 20시 04분


경쟁력 강화는 우리의 현위치를 정확히 파악하는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 자신의 강 약점을 객관적으로 아는 것만으로도 변화의 자극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거울의 중요성을 재음미해볼 필요가 있다. 거울이란 「남이 나를 보듯, 내가 나를 볼 수 있도록」 도와주는 도구다. 즉 객관적인 시각을 제공해 준다. 객관적인 시각을 상실하면 자칫 자만심에 빠지기 쉽다. 지난 80년대 후반에 미국경제가 침몰의 위기를 겪은 것도 자만심에서 비롯된 것이다. ▼ 겸허히 배우는 자세를 ▼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일등국가로서의 위상을 향유하는 과정에서 미국기업들 사이엔 자만심이 폭넓게 자리잡았다. 아무에게도 배울 것이 없다고 느꼈으며 오로지 자신들의 강점을 자랑하기에 바빴다. 전세계에서 소송이 가장 많은 나라, 변호사가 가장 잘 되는 나라가 바로 미국이다. 이처럼 「나만 잘 되면 그만」이라는 이기주의와 기업간의 두꺼운 벽이 미국의 국가경쟁력을 잠식했던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미국은 화려하게 경제적 재기에 성공했고 선진국들 중에서도 가장 높은 생산성을 기록하고 있다. 미국 경제력 회복의 근저에는 「벤치마킹」이라 불리는 겸허한 배움이 숨어 있다. 이제 미국에서 남에게 배운다는 것은 더 이상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그뿐 아니라 각자가 보유하고 있는 강점들을 공유함으로써 시너지효과를 창출하는 지혜마저 갖게 되었다. 그런데 지금 한국기업의 풍토는 어떤가. 과거 위기에 처했던 미국의 경우와 별반 다를 게 없다. 세계 삼류라는 현실을 인정하고 경각심을 느끼기보다는 국내 정상이라는 우물 속의 평온함을 즐기고 안도감에 젖어 있기를 원한다. 그런가하면 남의 말, 나보다 나은 것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소위 텃세가 심한 것이다. 어렵사리 모셔온 기술고문들의 노하우를 겸허히 배우려하기보다는 「배워서는 안되는」 온갖 이유를 찾아 내려는 오그라진 행태를 쉽게 볼 수 있다. 이런 우물안 개구리의 기질을 버리지 못하는 한 국가경쟁력 제고는 환상에 불과하다. 하루빨리 우물에서 뛰쳐나와 우리의 모습을 거울에 비추어 보아야 한다. 예를 들면 선진제품과의 비교전시회를 정기적으로 개최해 품질과 성능의 격차를 인식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 국내정상이 세계3류 ▼ 최고를 모르고서는 최고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몇년 전 미국 로스앤젤레스의 대형매장 한구석에서 먼지만 수북이 쌓인 채 천덕꾸러기 신세로 전락해버린 한국산 전자제품의 위상을 직접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그때의 안타깝고 아찔했던 경험이 최근 들어 부호분할다중접속(CDMA) 디지털전화 등 몇몇 세계적 첨단기술을 개발하는데 커다란 자극제가 됐다. 또한 기술고문에 대한 우리의 자세도 바뀌어야 한다. 그들의 경험과 노하우를 존중하는 한편 인간적으로도 극진한 대접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 그들이 갖고 있는 소중한 노하우라도 스스로 가르쳐주고 싶어할 정도가 돼야 한다. 세 사람이 가면 반드시 자기 스승이 있다는 말이 있다. 뛰어난 사람에게서 장점을 배우고, 잘못된 사람에게서도 타산지석(他山之石)의 교훈을 얻을 수 있다. 이건희(삼성그룹회장)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