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희 에세이/21세기 앞에서]이제는 「지구촌경영」

  • 입력 1997년 4월 29일 19시 52분


과거 우리는 국산제품의 경쟁력을 높이는 것을 지상과제로 알고 노력해왔다. 우리 자본으로, 우리 근로자의 손으로 우리 나라에 있는 공장에서 생산한 국산제품이 일제 미제와 경쟁해 세계시장에 당당히 진입했을 때 우리 모두 너 나 할 것 없이 기뻐했다. 이는 경제발전의 초기단계에 국내 생산기반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당연한 일이었다. ▼ 세계적 분업 일반화 하지만 나라별로 경쟁력이 차별화하고 사람 자본 정보가 국경을 넘어 자유롭게 이동하면서 범세계적인 분업이 일반화하고 있다. 예를 들어 GM의 이름으로 미국에 판매되고 있는 국산 자동차들의 내용을 들여다보면 미국상표가 붙어 있는 게 이상할 정도로 여러 나라가 관련돼 있음을 알 수 있다. 엔진과 전자부품은 일본 회사에서 조달하고 디자인은 독일 회사가 맡는다. 기타 일반부품은 대만 회사에서 조달한다. 마케팅은 영국 회사에 맡기고 미국시장 진출의 전략은 GM과 뉴욕주변호사가 담당한다. 결국 국내 자동차회사가 담당하는 것은 일부 조립생산뿐이다. 이 자동차는 과연 어느 나라 자동차일까. 이제 제품의 경쟁은 국가간 경쟁을 의미하지 않는다. 가장 좋고 가장 싸게 그리고 가장 잘 팔 수만 있다면 한 제품의 생산 판매를 위해 여러 국가의 자원을 활용해야 한다. 국내 기업들도 국내 임금이 올라가고 국내 입지조건의 한계를 느끼자 현지생산의 이점을 찾아 나서기 시작했다. 중국 동남아의 값싼 노동력, 유럽연합(EU)의 적극적인 정부지원 등 보다 나은 경영자원을 찾아 쉴 새 없이 이동하고 있다. 이제는 어느 나라에서 만드는가(Made in)는 의미가 없어지는 반면 누가 만드는가(Made by)가 중요한 시대가 되었다. 예전에 국산제품 만들기가 우리의 지상과제였던 것처럼 이제는 세계분업에 능동적으로 참여하여 세계적인 경쟁력을 갖추는 것이 새로운 시대의 사명이 된 것이다. 무국적 상품의 제조를 가능케 하는 경영환경을 우리는 초국적 기업의 번창에서 실감한다. 초국적 경영은 기업의 국제화에서 진일보한 또 다른 형태의 기업경영이라고 할 수 있다. ▼ 「누가 만드는가」 더 중요 기업에 있어서 지금까지의 국제화는 단지 해외시장에서 물건을 잘 팔기만 하면 되는 경제적 이유에서 이루어져왔다. 원가를 줄이기 위해 노동비가 싼 지역에 현지공장을 건설하고 물건이 팔리는 지역에는 판매거점을 세우는 식이었다. 그러나 이런 「양적 국제화」는 어느 사이엔가 한계에 봉착하고 말았다. 그 나라에 뿌리를 내리지 않은 기업은 그 나라 소비자로부터 사랑받을 수 없다는 단순한 이유에서이다. 세계 유수의 선진기업들은 양적 국제화에서 한발 전진하여 「질적 국제화」를 추진하고 있다. 바로 초국적 경영이 질적 국제화의 실체라 하겠다. 전세계 1백40여개국에 무려 1천3백여개의 계열사를 거느린 ABB라는 회사는 취리히에 본사를 두고 있지만 사내에서의 공용어는 영어다. 전세계에 퍼져 있는 자회사의 의사결정은 현지인으로 임명된 책임자에 의해 이루어진다. 모든 것을 국내에서 결정하겠다는 「우물 안 개구리」식의 발상을 버릴 때가 온 것이다. 이건희(삼성그룹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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