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오래된 정원 (338)

  • 입력 2000년 1월 31일 20시 01분


부인과 약혼자들이 남편과 애인을 찾아서 수개월 동안 눈보라를 헤치며 달려와요. 만난 사람들도 있었지만 남자가 먼저 죽거나 노상에서 여자가 병들어 죽기도 했죠. 그들은 형리와 심판관들에게서 갖은 모욕과 경멸을 당하며 세탁부나 허드렛일로 남편의 형기가 끝나기를 기다렸어요. 공작부인 트루네츠카야는 이르쿠츠크까지 와서 머물지 않고 두메 산골인 네르친스크의 혹한 속으로 남편을 찾아가요. 보르큰스카야 부인은 광산의 갱 속에까지 남편을 찾아가 그의 가슴에 기대지 않고 발목에 묶인 쇠사슬에 입을 맞추었대요. 그 뒤로 수많은 혁명가들이 이곳을 거쳐 갔어요. 레닌도 체르니셉스키도 그랬지요. 그들이 중노동형에서 사면된 것은 삼십 년 뒤였고 겨우 살아남은 사람들도 다시는 뻬쩨르부르그나 모스크바로 돌아가지 못했어요.

그런 이야기를 나누며 우리는 앙가라 강변 보도를 따라서 낙엽이 노랗게 떨어진 가로수 길을 걷던 게 생각납니다. 나는 윈드자켓을 걸치고 있었고 영태는 얇은 코트를 입고 벙거지 같은 모직 모자를 쓴 차림이었어요. 강변로에는 유모차를 끌고 나온 엄마들과 소풍 나온 연인들이 보였죠.

근대는 저러한 노력과 희생 끝에 겨우 칠십 년 동안 반체제의 바리케이트를 유지할 수 있었던 거야. 그런데 부르조아는 이걸 재탈환했어. 전 세계가 식민화 되는 과정에 있지.

영태는 베를린에서처럼 다시 시대의 주제로 돌아가고 있었지만 나는 매우 개인적이고 서정적인 이 여정을 방해받고 싶지 않았어요. 나는 지쳐 있었을 거예요. 데카브리스트 기념관의 손때 묻은 초라한 살림도구들과 형벌에서 겨우 풀려난 유배자의 고적한 삶의 흔적들 앞에서 나는 잠깐 당신을 면회하러 갔다가 돌아서서 어두운 창을 올려다보던 생각이 지나갔어요. 눈시울이 아주 짧은 순간 뜨거워졌지요. 나는 기념관 뜰 앞에 높직하게 뻗어 올라간 하얀 몸집의 자작나무를 올려다 보면서 그 기억을 흔들어 떨쳐버렸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후회되는 것은 나는 당시의 송영태를 너무도 이해하지 않으려 했던 점입니다.

변화라구 해야겠지. 누구나 무엇이든 햇빛 아래서 모두 변하잖아.

저 코쟁이들 페르샤 만에서 합심해서 두들겨 패는 것 좀 봐. 이제 남은 건 북쪽하구 쿠바 뿐이지. 카리브해 쪽으로 가서 버티어 볼까. 거긴 너무 멀구.

저 아기 좀 봐!

나는 유모차에 타고 앉아 엄마의 손짓에 까르르 까르르 웃어대고 있는 두어 살 쯤 된 아기에게로 다가섰어요. 엄마는 머리에 둘렀던 리본을 풀어 아기의 얼굴 앞에다 흔들고 있었는데 그게 바람에 팔랑거릴 때마다 아기가 웃고 있는 거였어요. 영태는 그냥 강을 향해서 낭떠러지 위에 세운 콘크리트 난간 앞에 서있었어요. 내가 아기의 가녀린 손가락을 쥐고 흔들어주자 엄마도 반가운 기색을 보이더군요. 나는 아기의 뺨에 입을 맞추고 영태에게로 돌아갔지요.

저기도, 또 저기도, 엄마와 아기가 많이 소풍 나왔네.

베를린의 공원에서도 많이 봤잖아. 왜 호들갑을 떨구 그래.

그냥…. 송 형은 가족들 싫어하지.

아버지를 증오해.

그러면서 어디 가서 버틴다구 그래. 그런데가 다들 아버지 중심으로 버티구 있었어.

<글:황석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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