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오래된 정원(266)

  • 입력 1999년 11월 8일 19시 16분


그네의 뒤로 머리가 벗겨진 덕에 늘 쓰고 다니는 자형의 낯익은 모자도 보였다. 나는 얼결에 의자에서 일어섰다.

두 분께서 웬일이세요?

누님은 내 두 손을 마주 잡고 흔들었는데 안경 속에서 벌써 눈자위가 붉어져 있었다. 당직계장이 말했다.

어서들 앉으세요. 특별접견이니까 시간은 충분합니다. 마음 놓고 말씀 나누다 가십시오.

계장이 눈짓을 하자 주임만 구석의 접는 의자에 앉고 양복은 계장과 함께 나갔다. 누님은 커다란 쇼핑 백 두 개를 들고 있었다. 주임이 물었다.

정문에서 검신하신 물건이죠?

예, 염려마세요. 음식이에요.

누님은 아직도 철망이나 아크릴 칸막이도 없이 나와 생짜로 만난 것이 믿기지 않는 표정이었다. 누님과 자형 부부는 지난 봄에 왔었으니까 반 년이 넘어서 다시 보는 셈이었다. 접견실 소지가 쟁반에 차를 받쳐들고 들어와 우리들 자리에 얌전히 놓고 나갔다. 나는 별로 할 말이 없고 두 사람도 잠시 가만히 앉아 있다. 접견 일지를 들고 앉은 주임도 펜을 멈추고 가만히 기다리고 있다. 누님이 먼저 입을 떼었다.

그래 너 시내 돌아다녔다면서…?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형도 말을 꺼낸다.

어제 아침에 갑자기 연락이 와서 느이 누난 밤새 한 잠두 못잤어.

늘 폐만 끼쳐드려 죄송합니다.

건강하게 있다가… 빨리 나와야지.

누님이 쇼핑백을 부시럭거리며 뒤진다.

내가 뭘 좀 만들어 왔다. 그리구 너 월동준비 해야겠지. 세타 두 벌 하구, 니 말마따나 동내의 얇은 걸루 두 벌, 털양말, 그렇게 맡겨 뒀다.

뒷전에서 주임이 가장 정확하다는 듯이 말을 거든다.

우리가 보관하구 있어요. 소에 돌아가면 영치품 수속을 밟아 내주도록 하지.

누님은 쇼핑백에서 은박지에 싼 먹을거리들을 차례로 꺼내어 탁자 위에 펼쳐놓기 시작했다. 그리고 껍질을 까듯이 은박지를 벗겨 나갔다.

이게 뭔가 좀 봐라. 엄마가 만드시던 그 김밥이야.

나는 그것에 대해서 잘 알고 있다. 나뿐만 아니라 우리 형제들은 모두가 그 김밥을 싸들고 소풍이며 운동회를 치뤘다. 우리는 어머니가 김밥을 쌀 때면 그 주위를 맴돌며 속이 비져나온 양쪽 끝 조각을 먼저 집어 먹으려고 다투곤 했다. 그래서 누구나 우리 김밥의 조리법을 잘 알고 있었다. 마른 김을 가볍게 굽는다. 그리고 그 위에 붓으로 참기름을 엷게 바른다. 고실고실한 밥을 김에 펴 놓고 가운데에다 속을 가지런하게 늘어 놓는다. 이 속이 맛의 비결이었다.

고기 다진 것을 달큼 짭조롬하게 간이 배도록 볶아 두고, 시금치는 풀이 완전히 죽지 않게 무치고, 옛날 식의 껍질이 조글조글한 단무지를 길게 썰어 두고, 계란을 얇게 부쳐 썰어 둔다. 여기서 한 가지만 빠져도 맛이 가버리는 법이다.

어머니는 이것들을 왕골 발로 싸서 조심스럽게 말아 나가면서 둥근 형태를 잡는다. 그리고는 참기름 바른 칼로 알맞은 두께로 썰어내는 것이다. 김밥 옆에는 잘 두드려 펴서 갖은 양념을 하고나서 숯불에 굽는 서울식 너비아니, 기름기 빠진 갈비찜, 버섯과 나물 몇 가지, 누깔사탕만큼 조그맣게 지진 굴전과 똥그랑땡, 그리고 제철 과일인 배와 단감, 마호병에는 식혜도 들어 있다.

<글: 황석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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