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오래된 정원(263)

  • 입력 1999년 11월 4일 19시 20분


맥주 몇 잔이 목구멍을 넘어가니까 대번에 얼굴이 화끈해졌다. 그리고 기분도 느긋하게 좋아졌다. 내가 정말 놓여난게 아닐까 하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영화관의 어둠 속에서도 나는 친구들과 어울려 휴일을 보내는 기분이었다. 스님이나 군인이나 아니면 어디 직장이 뚜렷하지 않은 젊은이들이 유일하게 사회와 만나는 접점이 영화관이다. 그것은 다른 세상의 얘기이기도 하고 남의 나라 그림이기도 하지만 세상 사람들이 지금 보고 느끼고 기억하는 시간에 동참하는 셈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는 신문은 덜 선명하지만 나중에 오랜 뒤에 신문 잡지의 구독이 허용 되었던 때의 충격은 몇 달 동안이나 계속 되었다. 자기만 빠진 세상이 아직 아무런 일도 없다는 듯 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영화관에서 나왔지만 아직도 대낮이었고 세 시 반쯤 되었다. 나는 눈부신 오후의 가을 햇살에 눈이 멀 지경이었다. 사람들의 옷이며 갖가지 색깔이 너무도 선명해서 거리가 온통 무슨 잔칫날 같았다. 그들은 무심하게 흘러갔다. 주임이 말했다.

야 이젠 별루 시간이 없는데 말야. 백화점말구 다른데 없을까?

양복쟁이가 내게 물었다.

시장두 괜찮지요?

시장? 그거 계호상 곤란한데….

점퍼가 주임을 쳐다보았다.

응 맞어, 여기서 동대문 시장이 지척이야. 거기나 한바꾸 돌지 뭐.

나는 그저 우두커니 네 거리에 서서 그들이 주고 받는 말을 듣기만 했다. 내가 아무 말이 없으니까 그들은 으레 내가 찬성한 걸로 알았는지 동대문을 향하여 종로통을 걷기 시작했다. 가는 도중에 나도 차츰 시장에 가보기로 한게 잘되었다고 생각했다. 종로 오 가를 넘어서자 시장은 벌써 시작되고 있었다. 우리는 길을 건너서 곧장 재래 시장 속으로 들어갔다. 넷이나 되던 우리는 주임과 내가 앞에 서고 양복과 점퍼는 뒤에 따라 붙은 행열이 되어 어슬렁 어슬렁 좌판 사이를 돌아다녔다. 골라 골라 티 한 장 단돈 천원, 바지 오천원. 아씨 한번 보고 가세요. 보세 잠바, 오리털 파카, 거저요 거저. 여어 짐 나가요 길 비켜요.

내게는 시장의 소음이 먼 유리창 넘어로 들려오는 아이들의 재깔거림처럼 느껴졌다. 귀가 막혔다가 서서히 뚫려갈 때처럼 곁의 주임 목소리만이 크게 들렸다가는 다시 멀어지곤 했다. 주임이 말했다.

오 형, 뭐 아무거나 안사? 사라구, 영치금 내준 거 있잖아.

아 그렇지, 내 작업복 주머니 안에 절반으로 접은 삼만 원을 만지작거려 보았다. 나는 한 손을 바지 주머니에 찌른채 무엇을 살까 둘러보았다. 주임이 다시 말했다.

헌데말야, 차입 허가품만 사야 될거야. 아니면 돌아가서 영치 당하니까.

그제서야 남겨두고 온 동료들 생각이 났다. 속옷을 파는 좌판 앞에 섰다. 운동시간에 사각팬티를 입는데 아무래도 관급품은 흰색이라서 잘 더러워진다. 추운 겨울에는 교도소 패션이라 하여 무슨 권투선수 흉내라도 내듯이 두터운 내의를 입은 위에다 사각팬티를 겹쳐 입는다. 그러면 내복 바람으로 밖에 나온 것처럼 보이지는 않지만 서로 괴상한 모양을 손가락질 하며 웃었다. 나는 줄무늬며 추상 무늬와 물방울 점이 찍힌 팬티를 큼직한 걸로 골랐다. 그리고 수인복 안에다 입을 긴팔 면 셔츠도 몇 장 산다. 색깔은 회색, 곤색, 흰색, 검정색, 밖에는 허용이 되지 않는다. 글씨가 박혀 있거나 요란한 무늬는 안된다.

<글:황석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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