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오래된 정원(254)

  • 입력 1999년 10월 25일 18시 49분


내게 바깥 세상으로 나갈 기회가 돌아온 것은 교양강좌가 있은 뒤 열흘쯤 지나서였다. 날씨가 제법 쌀쌀해져서 세탁부에서 장기수들에게 솜이불이 지급되었다. 화학 솜이라 새 것도 두어 해만 쓰고나면 솜이 뭉쳐서 이리저리 빈 동공을 만들어 맨 홑껍데기의 천으로 냉기가 스며들던 것이다. 그래서 수인들은 담당의 허가를 받아 출역 나간 다른 재소자들의 큰 방을 열어 달라고 하여 지급 받은 솜이불을 들고 들어간다. 마루 바닥에 이불을 펴 놓고 손으로 이불 홑청을 더듬으며 속에서 뭉친 솜을 일일이 편다. 가지런하게 펴놓고나서 이불 가운데 여러 곳을 바늘실로 꿰매야 한다. 이제부터 월동 준비가 시작된 셈이었다. 이불 안쪽에 사제 담요를 다시 꿰매기도 하고 담요 두 장을 겹쳐서 큼직한 자루와 같은 침낭을 만들기도 한다. 구매 봉사원에게 부탁하여 라면 박스를 모아 두었다가 얇은 스펀지 매트리스 밑에 깔기도 한다. 마루에서 올라오는 냉기로 겨울 아침에 일어나 보면 매트리스 밑의 상자 골판지가 축축하게 젖어있기 마련이었다. 차입되어 들어온 털양말 중에서 낡은 것을 골라 취침용 모자를 만든다. 밤이 되어 이불 자락 밖으로 머리만 내밀고 자다 보면 귀와 코가 시려워서 저절로 잠이 깨곤 했다. 양말의 한쪽을 잘라 한묶음으로 만들어 꿰매면 손쉽게 털실 모자가 되었다. 방에서 독서를 하다 보면 아무래도 손이 시려워서 두 손으로 책을 오랫동안 잡고 있기가 어려운데 실내용 장갑도 만들어 둔다. 운동할 때만 끼는 털실 장갑은 안되고 작업용으로 지급되는 목장갑 두 벌을 합쳐서 손가락 끝 부분을 자르고 바느질로 시치면 된다.

내가 그런 잡다한 월동 준비를 하는 참인데 교무과에서 데리러 왔다. 과장이 부른다는 것이다. 교무과는 기름 난로의 온기로 훈훈했다. 교수님 계장이 먼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내게 따뜻한 차를 권하고 나서 말을 꺼냈다.

오 형이 이번에 사회참관에 선정되었소. 나가 강력하게 추천을 했지라.

고맙군요.

헌디 조껀이 있어요. 나가기 전에 우리헌티 서약서 한 장 써야 쓸것이고 잉, 돌아오면 소감문을 써야 합니다.

나는 곧 귀찮은 생각에다 무력해지는 기분이어서 맥없이 중얼거리고 말았다.

그럼 그만두지요 뭐.

어허, 그만두다니. 모처럼의 기횐디 암튼 나가셔야지. 그래서 서약서는 내가 다 작성해 놓았구먼요. 밑이다가 이름만 쓰고 지장 찍으면 되지라.

그가 서약서라고 타자해 놓은 종이를 내게 내밀었다. 앞으로 소내 재소자 수칙을 준수할 것이며 참관 도중에 계도의 제반 규칙을 어기지 않을 것과 범칙 시에는 어떠한 처벌도 감수하겠다는 식이었다. 나는 그가 내미는 볼펜을 받아 수인번호와 낯설게 보이는 내 이름을 적어 넣었고 엄지 손가락에 인주를 묻혀 이름 끝에 찍었다. 뭔가 일을 저지르는 느낌이어서 엄지에 불그레하게 남아 있는 인주 자욱을 휴지로 지우고도 자꾸만 옷자락에다 문질렀다. 계장이 나에게 턱짓을 하면서 따라 들어오라고 말했다. 과장은 오십대의 살이 찐 사내였는데 눈두덩이 졸린 것처럼 아래로 축 늘어져 있는 인상이었다. 그는 목소리도 작고 졸린 듯했지만 두꺼운 눈꺼풀 아래에서 나를 노려 보는 가느다란 눈매는 제법 날카로워 보였다. 계장이 말했다.

이번에 참관 나가는 사람입니다.

<글:황석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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