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오래된 정원 (246)

  • 입력 1999년 10월 15일 17시 44분


안녕하세요? 저는 박은결입니다.엄마한테서 아저씨에 대한 말씀을 들었어요.

아, 그랬어? 나는 느이 아버지를 잘 아는 사람이다. 느이 엄마하구두 잘 알구. 지금 고등학교 삼 학년이랬나?

네에….

힘들겠구나. 대학에 가면 무슨 공부를 하고 싶지?

인문계요, 문과대학에 갈려구요.

공부는 잘 되니?

그럭저럭 따라갈만 해요. 아저씨는 외국에 오래 나가 계셨다면서요?

음… 그래.

어느 나라요?

미, 미국에 이민 갔지.

우리 아버지두 미국에서 돌아가셨는데, 아버지 친구분이라면 거기서 많이 만나셨겠네요.

그렇지.

어떤 분이셨어요… 그 분은?

조, 좋은 사람이었다. 세상살이는 잘 몰랐어요.

언제 서울에 오시죠? 거기 시골이라면서요.

며칠 후에 갈 생각이다.

서울오시면전화해주셔요. 꼭 뵙고 싶어요.

그래 꼭 전화 하지. 나두 은결이를 만나고 싶구나.

아저씨 안녕히 계셔요. 엄마 바꿔 드릴게요.

은결이의 목소리는 밝고 말 끝이 조금씩 높게 올라갔다. 부모와 일찍 헤어진 아이답지 않게 적극적이란 느낌을 받았다. 다시 정희의 침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전화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음에 서울 오시면 우선 제 병원으로 연락해 주십시오.

나도 얼버무리며 인사를 했고 전화는 끝났다. 나는 마루에 멍하니 앉아 있었다. 안방에서 통화가 끝난 기척을 알아챘는지 방문이 열리면서 순천댁이 툇마루로 나와 앉았다. 그네는 공연히 저고리 소매로 눈을 씻었다.

시상에 모질기도 허지. 무슨 전화를 고렇게 멜겁시 받소. 안들을라고 혀도 자꾸 들리더만. 고것이 어릴적부터 백여신디 무슨 눈치를 못챘을꺼나. 아니 오 선생, 나가 니 애비다 허지 그랬소?

나는 그저 벌죽이 웃으며 어두운 허공을 올려다 보았다. 순천댁이 또 은결이 이야기를 꺼낼까봐 마루에서 일어나며 인사를 했다.

전화 잘 썼습니다.

아니 뭐… 발써 가시게라오?

예 일찍 쉬겠습니다.

나는 어둡지만 눈에 익은 오솔길을 올라 집으로 돌아왔다. 내려올 때 켜 두었던 형광등 불빛으로 방문이 하얗게 밝혀져 있다. 밖에서 보면 격자 창살이 더욱 선명했다. 누군가 저 방안에 있는 것 같고 내 발자국 소리를 듣고 그림자와 함께 방문이 열릴 것만 같았다. 이제 와요?하는 목소리와 그네의 어두운 실루엣이 툇마루 위로 나타날 것이다. 나는 신을 벗고 툇마루에 올라 방문을 열고는 안에 아무도 없다는 걸 확인한다. 방안에 들어서지 않고 마루에 털퍼덕 주저앉아 봄 밤을 수 놓고 있는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저봐, 별똥이 진다. 또 누가 세상을 떠나는가 보다. 멀리서 개 짖는 소리가 고즈넉하게 들려왔다. 어딘가 살아있다 하더라도 같은 장소에서 함께 있었던 사람의 부재는 거기 남은 한 사람까지 존재하지 않게 만든다. 방 안의 모든 물건과 하늘의 별들까지도 꿈에 나오는 것처럼 곧 다른 장면으로 바뀌면서 사라져 버릴 것만 같다.

<글:황석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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