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오래된 정원 (190)

  • 입력 1999년 8월 9일 18시 31분


송영태와 다툰 뒤에 학교에서 우연히 그와 부닥치게 되었습니다. 교내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있는데 누군가 내 앞에 와서 식판을 소리나게 내려놓으며 앉았어요.

앉아두 되지?

자식이 내놓고 반말이잖아. 그날 이후 젊은이들 말로 야자를 트게 된 셈이어서 나도 서슴지않고 대꾸했지요.

누가 말려?

그날 미안했어.

뭐가?

내가 좀 잘난 척하지 않았나 해서….

송이 그렇게 맥없이 중얼거리자 나는 오히려 내가 너무했다는 생각이 들고 미안했지만, 욕 먹어두 싸지 하는 말이 입 속으로 지나가면서 순간 표정을 바꾸었습니다.

무슨 짓을 하든 표를 내는 건 질색이야.

한 형…나하구 친구 하지.

웬수는 아니니까 걱정말어.

그는 벌쭉이 웃고나서 숟가락을 들고 고봉으로 퍼먹기 시작했어요. 나는 그냥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죠.

나 결혼한 사람야.

그는 숟가락질을 하다가 잠깐 멈추더니 천천히 고개를 쳐들고 나를 바라보았어요.

그랬나?

딸두 하나 있구.

그는 다시 아무 소리 않고 밥을 퍼먹었어요. 말을 해놓고나서 나는 좀 싱거운 생각이 들었지요. 그보다 먼저 시작했기 때문에 진작에 식사를 마치고 슬그머니 식판을 들고 일어났는데 그가 먹다 남은 식판을 들고선 내 뒤를 따르는 거예요.

부탁이 있는데….

학교 식당을 나와 도서관으로 향하는데 그가 내 옷깃을 잡아 벤치에 끌어다가 앉히는 거였어요.

나 읽을 책이 많아. 리포트 내야한다구.

요즈음 화실 한가하잖아?

그래, 겨울까진 학생 안받을 거야.

거기서 작은 모임을 좀 가지면 안될까?

속내가 뻔한 얘기라서 나는 그에게 내용을 묻지는 않았어요.

학구적인 모임이라면…그 대신 나는 외출하거나 화실에 있어두 차 한 잔 타줄 수 없어. 그런 것들은 각자 지참들 하라구.

한 형 고마워. 내일 전화하지.

그러고는 멋대로 쓰윽 일어나서 가버리는 거예요. 당시에 학교 안의 숨통은 예전보다 훨씬 열려 있었고 일 학기에 벌어졌던 싸움이 방학 동안에 정리가 된 것처럼 보였어요. 개학을 하면서 바로 무엇인가가 안으로부터 꿈틀대며 움직이기 시작한 것 같았지요.

나는 그날이 주말이라 늦게까지 도서관에 있다가 사방이 어둑어둑해져서야 학교에서 나왔고, 전화를 하고는 그 길로 집에 가는 버스를 탔어요. 추석이 가깝도록 집에 가지 못해서 은결이를 본 지가 언제였는지 가물가물 했지요. 동네 어구에 있는 연쇄점식의 그 당시 슈퍼에 들러서 엄마 좋아하는 굴비 한 두름 사고 양품점에서는 은결이의 작은 옷 몇가지를 샀어요. 백화점 갈 시간도 없었다니 나는 제 코 앞도 못보고 세월을 보냈나 봐요. 겨우 대학원 수업이나 간신히 때우면서 그림도 안 그리고 돈도 제대로 벌지 못하면서 말예요. 우리 집의 푸른 색 대문과 외등이 보이자 나는 저절로 가슴이 두근거려요. 큰 잘못을 저지르고 먼데서 돌아오는 부랑자처럼 말이지요.

<글:황석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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