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오래된 정원(179)

  • 입력 1999년 7월 27일 18시 56분


내가 모이를 창턱과 창문턱에다 뿌려주자 그는 마치 나를 믿는다는 듯이 창문턱에까지 들어서서 천천히 쪼아먹고는 부리를 쇠창살에다 몇번 비비고 날아갔다. 그가 혼자 찾아와서 모이를 달라고 비닐창을 두드리면 내가 모이를 주는 일이 몇 차례인가 반복되고 나서 대장이 다른 비둘기 한 마리를 데리고 날아왔다. 그게 순이였는데 순백색의 날씬한 몸매에 언제나 고개를 약간 숙이고 있어서 한눈에 암컷인 줄을 알아보았다. 다소곳이 고개를 숙인 자세는 사실은 왼발을 못쓰기 때문이었다. 발목이 싹둑 잘려나간 다른 비둘기들과는 달리 순이의 발목은 자기 몸 안쪽으로 오그라들어 있었다. 대장은 창문을 툭툭 건드리고 나서 모이를 주자 정면에서 비켜나 순이에게 좋은 자리를 양보했고 순이가 조심스럽게 모이를 쪼는 동안 곁에서 몸을 부풀리고 제자리걸음을 했다. 순이가 적당히 먹고 나자 그제서야 남은 모이를 먹고 나서 둘은 창고 지붕 위로 날아가 사이좋게 앉아 있었다. 다른 비둘기 무리가 시간 맞춰 날아들기 시작하면 둘은 창고 지붕의 다른켠에 멀찍이 피하듯 앉았다가 곧 다른 곳으로 날아가 버렸다.

여러 날이 지나면서 나와 낯을 익히게 된 순이가 먼저 날아오게 되었고 어느 때는 혼자 날아오기도 했다. 순이는 불편한 다리를 오그리고 한 발로 서서 비닐을 통해서 나를 조용히 바라보는 것이었다.

으응, 순이 왔구나. 밥 먹어야지.

하고 말을 걸면 주춤거리면서 창문턱으로 다가섰다. 내가 창문을 열어도 순이는 달아나지 않고 모이를 기다렸다. 언제나 내가 제작한 사료의 양이 일정하지는 않아서 많이 줄 때도 있었는데 순이는 항상 적당량만 먹고는 이내 자리를 떴다. 어느 비 오는 날에 방을 나갔다가 돌아오니 순이 혼자 창턱에 앉아 쉬면서 나를 기다리기도 했다. 운동시간에 사동 앞 빈터에서 올려다보면 다른 비둘기들은 그맘때에 먹을 것이 있는 취장 부근으로 다 가버렸건만 순이 혼자 가만히 앉아 있는 게 보였다. 대장은 어디서 맘껏 나돌아다니다가 저녁밥 때에야 순이와 함께 날아오곤 했다. 나는 이들과 다른 무리의 비둘기들을 분리해서 밥을 주기로 했다. 그런데 차츰 다른 무리들도 이들에 대한 특별대우를 눈치채고 있어서 순이가 혼자 날아오면 곧장 연이어 비둘기 떼가 창턱으로 몰려들었다. 순이는 비둘기들에 둘러싸이면 부리짓 한번에 쉽게 자리에서 밀려나 버렸고 다투지 않고 창고 지붕 위로 날아가 혼자 조용히 앉아 있다가 가버렸다. 그러나 대장이 있으면 달라졌다. 그가 무리와 함께 올 적에도 대장은 맨먼저 지붕에서 창턱으로 날아와 비닐을 두드렸고 모이를 주면 혼자 먹기 시작하는데 다른 비둘기들은 지붕 위에서 기다리는 것처럼 보였다. 가끔씩은 용감한 수컷 비둘기 두어 마리가 날아와 곁에서 함께 먹기도 했다. 대장은 일단 모른 체해 주었다. 그러나 자기 자리 근처로 비집고 다가오면 대번에 큰 날개를 팔처럼 펼쳐서 후려쳤고 밀린 비둘기는 창턱 아래로 떨어져 지붕 위로 돌아가곤 했다. 다른 무리가 많을 때에는 대장은 적당히 먹고 나서 지붕도 거치지 않고 곧장 본관 건물을 넘어 사라져 버렸다. 나는 대장과 순이 외에도 무리들 가운데 다른 몇 마리 비둘기에게도 관심을 가졌다.

〈글:황석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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