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윤종의 쫄깃 클래식感]같은 듯 다른 듯… 두 작곡가 ‘세르게이’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10월 1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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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 전인 1917년, 러시아에서 사회주의 혁명이 일어나자 귀족과 기업가들 외에도 많은 인물들이 국외로 탈출했습니다. 그중에는 음악사에 이름을 남긴 명작곡가들도 있었습니다. 대표적으로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1873∼1943·위 사진)와 세르게이 프로코피예프(1891∼1953·아래 사진)를 꼽을 수 있습니다.

두 ‘세르게이’의 음악은 달랐습니다. 라흐마니노프는 ‘위대한 낭만주의자’ 차이콥스키의 후예를 자처했고 차이콥스키의 감수성과 짙은 센티멘털리즘을 이어받았습니다. 프로코피예프는 제1차 세계대전 무렵 붐을 이룬 현대적 경향을 작품에 반영했습니다.

망명 이후의 생활이 순탄치 않았던 점은 두 사람이 공통됩니다. 망명 이전 피아노 협주곡 2, 3번 등 수많은 인기작을 내놓았던 라흐마니노프도 미국 망명 이후에는 작곡만으로 생활을 이어가기 어려웠습니다. ‘피아노 명인’이라는 장기를 살려 콘서트 피아니스트로 미국 전역과 세계 곳곳을 누비지만 작곡가로서의 역할은 크게 줄어듭니다.

프로코피예프는 프랑스를 중심으로 한 서유럽에서 작곡가로서의 활로를 찾지만 1930년대 대공황이 닥치면서 신작을 발표할 통로가 크게 줄어들고 맙니다. 결국 1934년 고국인 러시아, 즉 소련으로 되돌아갑니다.

프로코피예프의 소련 생활은 처음 성공적이었습니다. 바이올린 협주곡 2번, ‘피터와 늑대’ 등이 거듭 성공을 거두었고 쇼스타코비치와 함께 소련을 대표하는 작곡가로 지위를 굳혔습니다. 그러나 1948년, 소련 음악가 회의는 그를 ‘인민에 대한 고려가 없는 형식주의자’라고 비판합니다. 프로코피예프는 ‘프라브다’지에 반성문을 기고하고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보수적인 스타일로 돌아갑니다.

서방에서 삶을 마친 라흐마니노프와 소련으로 돌아간 프로코피예프, ‘두 세르게이’의 첼로 소나타가 12일 나란히 연주됩니다. 서울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열리는 요요마 첼로 리사이틀입니다. 이 두 작곡가의 소나타를 나란히 프로그램에 올렸습니다. 프로코피예프에게 많은 영감을 준 스트라빈스키의 ‘이탈리아 모음곡’도 연주합니다. 역시 러시아인이었던 스트라빈스키는 혁명기에 서방에서 활동 중이었으며, 고국으로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유윤종 기자 gustav@donga.com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세르게이 프로코피예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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