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속의 이 한줄]세상의 모든 폭력 거부하고… ‘나무’가 된 그녀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7월 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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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 영혜의 낡은 검은 스웨터에서 희미한 나프탈렌 냄새가 났다. 그녀가 대답하지 않자, 영혜는 한 번 더 언니, 하고 속삭였다. 언니. …… 세상의 나무들은 모두 형제 같아. ―‘채식주의자’(한강·창비·2016년)

“불편하던데.”

서울 종로의 한 카페에서 남자 직장인 A(30)가 말했다. 옆에 있던 직장인 B(29)도 “나도”라고 거들었다. 우린 커피를 마시며 ‘채식주의자’ 얘기를 하고 있었다.

지난 주말, 뒤늦게 채식주의자의 마지막 장을 덮고 나서 나는 그들의 불편을 이해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고기를 먹지 않는 것은 시작일 뿐이었다. 햇살 아래 맨가슴을 내놓고, 비 오는 산에서 나무로 서 있고 싶어 하는 주인공은 해설자의 표현대로 ‘의식의 퓨즈가 서서히 끊어지는’ 중이다.

좋은 소설에 대한 정의는 각자 달라서 책을 읽는 이들의 수만큼 있다. 나의 경우, 소설 속 상황과 시대와 모든 장치가 나의 것과 다름에도 불구하고 그 안에서 나를 발견할 수 있다면, 그래서 촉각이 곤두세워지고 마음이 뒤흔들릴 수 있다면 좋은 소설이었다고 말한다.

채식주의자는 책장마다 핏물이 맺힌 느낌이었다. 책을 읽는 내내 어지럽고 편하지 않았다. 하지만 주인공 영혜가 정신병동에 이르러 언니, 라고 부르는 장면에 닿자 나는 모든 불편함이 일거에 무너진 기분을 느꼈다. 지금은 다 커서 각자 밥벌이하고 잘 살고 있는 내 여동생이나, 내가 아낀 동생들이 아직 어리고 약했을 때 나를 그렇게 불렀다. 깜깜하고 무서울 때, 자고 일어나 옆을 짚어볼 때, 그렇게 언니, 라고 조용히 불렀다.

세상의 나무들은 모두 형제 같아, 라는 말에는 주인공이 찾아낸 서글픈 평화가 있다. 그녀의 퓨즈가 깜박이며 서서히 잦아들게 한 원인은 여러 가지다. 누군가는 그중에서 어린 시절 개 도살 장면의 충격을, 아버지의 폭력성을, 혹은 남편과의 기계적인 관계를 꼽을 것이다. 그 모든 폭력을 거부하는 방법으로 그녀는 나무가 되었다. 그녀에게 나무는 평화로운 존재였고, 그래서 많은 이들이 어린 날 기억으로 갖고 있는 형제애이자 태초의 위안이었던 것이다.

곽도영 기자 now@donga.com
#채식주의자#한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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