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 온 새댁이 산나물 서른 가지 모르면 굶어 죽는다’는 말이 있다. 또 ‘아흔아홉 가지 나물노래를 부를 줄 알면 삼년 가뭄도 이겨낸다’는 속담도 있다.
나물은 대대로 구황(救荒·흉년 등으로 굶주림에 빠진 빈민을 구제하는 일)의 식물이다.
율곡 이이(1536∼1584)의 ‘전원사시가’ 중에서 ‘봄’편을 보자.
‘어젯밤 좋은 비로 산채가 살졌으니/광주리 옆에 끼고 산중에 들어가니/주먹 같은 고사리요 향기로운 곰취로다/빛 좋은 고비나물 맛 좋은 어아리라/도라지 굵은 것과 삽주순 연한 것을/낱낱이 캐어내어 국 끓이고 나물 무쳐/취 한 쌈 입에 넣고 국 한번 마시나니/입안의 맑은 향기 삼키기 아깝도다.’
율곡은 ‘산나물 박사’다. 어디에서 나는지, 어떻게 생겼고 요리법은 무엇인지, 그리고 그 맛을 아는 자다. 궤변이지만 임진왜란을 예견하고 선조에게 ‘10만 양병설’을 건의한 것도 산야에 먹을 게 많다는 생각 때문이었을까. 봄이 지나 초여름까지 누가 씨를 뿌리지 않아도 산야에서 끈질긴 생명력으로 솟아나던 나물. 초근목피가 풍부했으니 율곡의 생각도 그럴듯하다.
이 시에서 처음 등장한 나물은 단연코 고사리다. 500년 가까이 흐른 지금도 고사리는 나물의 대명사다.
◇ 고사리
‘고사리손.’ 어린순의 위쪽이 앙증맞게 움켜쥔 어린이 손 모양 같다 해서 나온 말이다.
‘본초강목’에도 ‘어린이 주먹 모양이며, 펴면 봉황새의 꼬리 같다’고 했다.
최근 전국 생산지에서 앞다퉈 고사리 축제가 열렸다. 무엇이 중국산·북한산이고 토종은 어떤지 궁금할 때다. 토종은 가늘고 길며 윗부분이 원래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 채취할 때 손으로 뜯어 절단면이 거칠다. 고유의 향이 있고 육질이 연하다. 하지만 외국산은 굵고 길며 윗부분이 거의 없다.
고사리는 마늘과 파로 양념하는데 이는 알리신 성분이 비릿한 냄새를 제거하기 때문이다. 고사리가 구황식품이기는 하지만 끼니를 대신할지는 의문인 고사가 있다.
중국 주나라 때 백이·숙제 형제는 무왕에게 ‘은나라는 치지 말자’고 제의했다가 거절당하자 수양산에 들어가 고사리만 먹다 죽었다고 한다. 그들이 굶어 죽었는지, 아니면 고사리만 먹어서인지 확실치 않다.
영국의 식물학자 글래퍼는 고사리가 기생충을 박멸하나 임산부와 태아에겐 위험하다고 했다. ‘본초강목’에도 ‘오래 먹으면 눈이 어두워지고, 코가 막히고, 머리가 빠진다’고 했다.
하지만 우리 조상은 삶아서 먹는 지혜를 지녔다. 물에 불려 우려내고 다시 삶고 양념에 볶아 그 맛을 깊게 했다. 다양한 요리로도 변신한다. 산림청에서 발간한 ‘숲에서 자란 청정임산물 요리’ 책자를 보면 누름전 들깨죽 어묵말이 등을 소개하고 있다.
그중 어묵말이는 만들기 쉽고, 모양도 예쁘고, 먹는 데 재미가 있다.
“기쁨을 누릴 수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 기쁨을 함께 나눠야 한다. 행복은 쌍둥이로 태어난다.”(로드 바이런) 충분히 만들어 이웃과도 나눠 먹자.
◇ 곤드레
요즘 강원도에 가면 곤드레밥을 파는 식당이 많다. 도심에도 눈에 띈다. 정선과 평창에서는 곤드레 축제도 열렸다.
‘곤드레’는 고려엉겅퀴다. 바람에 흔들리는 잎사귀가 마치 술 취한 사람과 같다 해서 붙은 이름이라 한다.
서민들이 가장 넘기기 어려웠던 보릿고개에 곤드레는 어김없이 우리 곁에 왔다. 가을걷이한 곡식은 떨어진 지 오래고, 보리는 아직 이삭도 패지 않았을 때 곤드레는 험한 보릿고개를 넘게 해줬다. 어린잎과 줄기를 밥에 섞으면 양이 부풀어 끼니를 푸짐하게 해줬다.
서민들의 배고픔을 달래주던 곤드레가 지금은 기름진 음식에 식상한 도시민들에게 참살이 먹을거리가 됐다. 먹어보지 못했다면 조리에 서툴러도 후회하는 법이 없다.
말도 재미있지 않은가. ‘곤드레만드레.’ ‘만드레’라는 말은 어원은 정확하지 않으나 ‘영감땡감’ ‘눈치코치’ ‘미주알고주알’처럼 운율을 맞추기 위한 표현이라는 설이 있다. 모내기 후 세벌김매기를 한 6월 중순∼7월 초에 부르는 농요 ‘만드리’에서 기원했다는 말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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