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삶 나의 길/송월주 회고록]<42>“세월을 이기는 것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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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12월 2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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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토끼의 뿔과 거북의 털을 구하러 다녔소

금오 스님의 사상을 재조명하기 위해 2008년 결성된 모임의 발족 행사. 송월주 스님을 포함한 금오 스님의 제자들은 종단사에서 큰 족적을 남겼다. 불교신문 제공
금오 스님의 사상을 재조명하기 위해 2008년 결성된 모임의 발족 행사. 송월주 스님을 포함한 금오 스님의 제자들은 종단사에서 큰 족적을 남겼다. 불교신문 제공
1956년 속리산 법주사에서 출가했을 때 바깥세상은 궁핍과 대립, 혼돈의 연속이었다. 세상의 번뇌를 끊을 진리를 찾아 나섰지만 그 길은 쉬운 게 아니었다. 자연을 벗 삼아 여법하게 수행하는 스님들의 삶에 이끌려 출가했지만 막상 발을 들여놓고 보니 출가 생활 역시 녹록하지 않았다. 바깥세상이 어려우면 절집도 가난한 법이다. 더욱이 대처승(帶妻僧)을 상대로 한 정화운동이 본격화하던 시기라 산중도 조용할 수는 없었다.

수행과 계율에 철저했던 은사 금오 스님은 제자들을 가르치는 데 특히 많은 공을 들였다. 월산·범행·월남·탄성·이두·혜정·월서·월탄 스님 등 50명에 가깝다. 앞서 밝힌 대로 ‘월’자를 딴 제자가 많아 불교계에서는 ‘월자문중(月字門中)’이라는 말이 나왔다.

나는 호랑이 스승 아래 큰 뜻을 품은 사형제들 사이에서 열심히 수행했다. 부모의 정을 뿌리치고 나선 길이기에 목숨을 걸고 공부했다. 은사가 준 화두는 ‘이 뭐꼬’였다. 20대 후반 한때 건강이 나빠 잠을 청하기 어려운 때도 있었다. 백약이 듣지 않았다. 그런데 어느 순간 화두삼매(話頭三昧)에 빠졌고, 그 순간 병이 사라지는 신기한 체험을 했다.

그러나 여러 해가 지나면서 나의 수행 근기(根氣)는 참선에만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참선 위주로 수행하기에는 몸이 체질적으로 약한 데다 정화운동 중 은사를 도와 여러 소임을 맡아 사찰 내의 일을 처리해야 했다. 자연스럽게 개인적 수행뿐 아니라 종단과 사회 속에서 다른 사람들을 돕는 보살행을 실천해야 한다는 원력(願力)도 더 강해졌다.

맏사형 월산 스님은 나이 차가 많아 은사 같은 분이었다. 일찍이 봉암사 결사에도 참여한 선승(禪僧)이었다. 그러면서도 갑사와 신흥사, 법주사 주지와 총무원장을 지내는 등 행정력도 뛰어났다. 언제나 한쪽으로 치우치지 말라는 중도(中道)의 가르침을 주곤 했다. 범행 스님은 선학원 이사장과 동화사, 불국사 주지를 지냈다.

‘효(孝) 상좌’인 탄성 스님은 덕이 뛰어나 문중 내의 대소사를 챙겨주는 장형 같은 존재였다. 스님은 종단의 위기를 수습하는 역할을 무리 없이 처리했다. 1980년 법난 때 나는 신군부의 강압에 의해 총무원장 권한을 당시 정화중흥회의에 참여했던 탄성 스님에게 넘겼다. 1994년에는 반대였다. 총무원장 의현 스님이 개혁세력에 의해 물러난 뒤 탄성 스님이 사태 수습을 맡았다. 그 뒤 내가 제28대 총무원장으로 선출된 뒤 업무를 인수했다. 법난 때도 종단의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나선 탄성 스님의 속뜻을 알기에 오해는 없었다.

혜정 스님과의 인연은 필설로 쉽게 담을 수 없다. 고향 친구이자 사형이자 평생 도반이었다.

지난해 혜정 스님이 주석하던 충북 괴산군 각연사에 갔다. 스님은 무의식 상태였다. 그러나 내가 모든 것이 인연 따라 생기고 멸한다며 위로하자 마치 의식이 돌아온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입적 하루 전이었다. 젊은 날 그이와 주고받은 편지에서 내가 애국(愛國)과 위민(爲民)의 삶을 얘기하면, 그는 불법의 즐거움을 담아 화답했다.

그가 언급한 무상송은 사실상 나의 출가를 권유하는 것이었다. ‘삼계유여급정륜 백천만겁역미진(三界猶如汲井輪 百千萬劫歷微塵·삼계는 마치 우물의 두레박처럼 돌고 도니 백천만겁의 많은 세월을 겪은 티끌이로다) 차신불향금생도 갱대하생도차신(此身不向今生度 更待何生度此身·이제 이 몸이 금생에서 제도하지 못하면 다시 어느 생을 기다려 제도할 것인가).’

사제 월서 스님은 종회의장과 호계원장을 지낸 뒤 원로회의 의원으로 있다. 정화운동 중 할복을 시도했던 ‘육(六)비구’의 한 명인 사제 월탄 스님은 1994년 총무원장 선거에서 경합하는 등 얄궂은 인연을 맺었다.

한 스승 아래서 배운 뒤 50여 년이 흘렀다. 이미 세상을 뜬 사형제도 적지 않다. 우리들은 출가 뒤 자신이 정한 뜻에 따라 그 길을 걸었다. 때로 같은 길에서 만났고, 어느 때는 외나무다리에서 마주쳤다. 쌓은 정보다 미움이 더 컸을지도 모른다. 그런들 어이하랴. 세월을 이기는 장사 없다는 말이 맞다. 내가 옳다고, 그걸 다음 생에 지고 갈 것도 아니다. 세월을 이기는 것은 없다.

정리=김갑식 기자 dunanworld@donga.com   

<43>회에서 송월주 스님은 1980년 10·27법난 뒤 자의반타의반 해외로 떠나 미국과 유럽 속의 불교와 새로운 문물을 접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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