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스트셀러 따라잡기]나긋하게 풀고 쫄깃하게 옮기고…

  • 입력 2008년 4월 26일 02시 58분


동갑내기 ‘노처녀’ 친구. 어느 날 선문답을 늘어놨다.

“나이가 드니 감정은 사라지고 감각에는 날이 서.”

갸웃했더니 남녀관계 얘기다. 어릴 땐 좋은지 싫은지 감정을 생각했다. 근데 요즘은 조건을 따지는 감각만 오롯하단다. 왠지 진짜 ‘사람’ 만날 기회는 줄어든다는 푸념이다.

그 앞에선 말 못했지만 욕심 탓이다. ‘색즉시공’을 되뇌어도 소용없다. 원인을 알아도 포기가 안 된다. 그러니 한숨 날 수밖에.

출판계에서 이런 ‘욕심의 번뇌’는 영원한 보고다. 심리학부터 우화집, 자기계발…. “세상 변화가 심할수록 심신 안정을 책에서 찾는 경향”(박윤우 부키 대표)이 있다. 하긴 공부란 게 마음 다스리는 거 아닌가.

그런 의미에서 요즘 서점가의 블루칩은 ‘술취한 코끼리 길들이기’(이레)다. 올해 초 출간돼 벌써 5만 부가 넘었다. “마음속 코끼리를 따르지 말고 코끼리 주인이 되라.” 알 듯 말 듯. 저자는 태국 승려다.

‘아잔 브라흐마밤소 마하테라’라는 긴 이름의 저자는 원래 영국인이다. 기독교 집안의 젊은이로 ‘어느 날 문득’ 불교도임을 깨달았다. 케임브리지대에서 이론물리학까지 전공한 과학도가 방콕으로 날아가 머리를 깎았다.

그러고는 모신 스승이 태국 남방불교 수행법인 ‘위빠사나(vipassana)’의 거목 아잔 차 스님. 벽안의 청년은 9년 가르침 끝에 가장 지혜로운 수행승으로 성장했다. 그리고 30년. 그 영적 육체적 깨달음을 모은 책이 ‘술취한 코끼리…’다.

법정 스님의 ‘무소유’ 이래 국내 서점가는 숱한 잠언집의 격전지였다. 제목 등이 엇비슷해 헷갈린다. 그만큼 돋보이기 쉽지 않다. 거기서 ‘술취한 코끼리…’의 성공 전략은 ‘젠체하지 않음’이었다.

일단 이 책에는 아리송한 표현이 없다. 솔직한 경험과 108개 ‘코끼리’(일화 또는 우화)가 읽기 편하게 버무려졌다. 삼라만상을 껴안을 듯한 법문 말투보다 카운슬러의 나긋함이 묻어난다. 록에 탐닉하던 옛 시절 얘기 등 억지로 속세와 연을 끊는 딱딱함도 없다.

여기에 ‘번역의 힘’이 작용했다. 이 책을 옮긴이는 시인 류시화 씨. 그를 비롯해 소설가 이윤기 안정효 씨 등은 대표적인 인기 문인 번역가다. 이런 스타들은 번역량이 아닌 판매량에 따라 3∼5% 인세를 받는 ‘티켓 파워’를 지녔다.

특히 류 씨는 마음 관련 서적을 문인다운 감수성으로 푸는 데 일가견이 있다. 그가 번역한 ‘마음을 열어주는 101가지 이야기’ ‘달라이 라마의 행복론’ 등이 대부분 베스트셀러다. 2006년 30만여 부가 팔린 ‘인생수업’(이레)은 ‘술취한 코끼리…’와 저자가 다른데도 번역한 류시화표 연작으로 보인다. 표지 일러스트도 같은 화가(이채련 씨)가 그렸다.

마음은 중요하다. 이동우 상계백병원 정신과 교수는 “요즘은 ‘몸짱’ 열풍을 벗고 ‘마음짱’을 추구하는 분위기”라고 말했다. 독서로 욕심을 꺼뜨릴 수 있다면야…. 읽고 또 읽어 ‘세상에 읽을 만한 단 한 권의 책’(아잔 차)에 다가가고픈 현대인 심정. 그렇다면 미혼 친구에겐 결혼 욕심도 버리라 해야 하나. 중생의 마음은 역시 갈 지(之)자를 그린다.

정양환 기자 ra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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