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스트셀러 따라잡기]연예인책 허우대만 멀쩡?

  • 입력 2008년 3월 29일 02시 59분


재즈처럼 솔직한 호란의 글

우연히 연예인 A 씨와 술자리를 가진 적이 있다. 분위기 좋았다. 형, 동생 하며 말까지 텄다. 직업을 묻기에 기자라고 말했더니 그가 한마디 한다.

“저…, 기자님. 매니저 합석해도 될까요?”

갑자기 ‘경계 모드’로 돌아선 것이다. 직업 때문에 인터뷰를 자주 하지만 매니저가 사이에 있으면 인터뷰는 별로다. 주어진 질문, 정해진 답. 사람을 만났는데 체향(體香)이 없을 때도 많다.

그런데 요즘 출판계에는 연예인 바람이다. 신해철 이상은 배두나 박지윤…. “출판사 입장에서 보면 연예인 책은 탐나죠. 홍보도 되고, 판매도 기본은 하거든요. 다만 ‘개성적인’ 이미지가 받쳐줘야 합니다.”(박영준 교보문고 광화문본점장)

그러다 보니 연예인들이 낸 책은 대체로 ‘이미지 과시용’이겠거니 하는 선입견이 든다. 화제는 되겠다 싶지만 책의 ‘외적 조건’으로 평가하는 게 꺼려진다.

하지만 그 선입견이 영화배우 최은희 씨를 만났을 때 깨졌다. 지난해 말 자서전 ‘고백’(랜덤하우스)을 냈을 때다. 최 씨는 “명색이 자서전인데 좋은 기억만 갖고 쓸 순 없었다. 치부를 드러내는 대목에선 망설이기도 했다. 하지만 누가 봐도 솔직하게 썼다고 자신한다”고 말했다. 신변 관련 질문을 준비해 갔던 기자가 머쓱해졌다. 그 책 제목대로 고백 하나, 그 인터뷰 뒤 그 책을 다시 열심히 읽었다.

3인조 밴드 ‘클래지콰이’의 여성 보컬 호란 씨는 두 번째였다. 출판사 관계자를 통해 기자와 만나자며 인터뷰는 아니라고 한다. 자기 책이 어찌 보이는지 궁금하단다. 휴일 집에서 입던 차림대로 설렁설렁 갔다. 필기구나 노트북도 없이. 대신 책, ‘호란의 다카포’(마음산책)만 꼼꼼히 읽었다.

나가 보니 매니저에 코디에 딸린 식구도 많았다. 이후 일정도 빠듯했다. 그런데 책에 관해서만큼은, 그는 가수가 아니라 ‘저자’였다. 이 책은 2주 만에 7000여 권이 나갔다.

“대단한 메시지가 있는 건 아니에요. 책 냈다고 ‘척’할 것도 없고요. 원래 거창한 이미지는 없어요. 다만 글을 좋아합니다. 아직 책을 낼 때는 아니다 하는 고민도 했지만…. 음악 하는 이의 진솔한 얘기도 재밌을 수 있겠다 싶었어요.”

이 책, 참 솔직하다. 음악이 직업이 되자 스트레스로 바뀌던 시절, 대중 앞에서 ‘가짜 뿔’로 치장한 유니콘의 심정. 공감 가는 대목이 많다. 잔잔하지만 당당하다.

‘문장’도 좋다. 다소 만연체지만 리듬이 살아 있다. 편안히 이어지는 재즈처럼. 가끔 거울 앞에서 매무새를 다듬는 20대 여성의 감성도 굳이 숨기지 않는다.

‘칠푼이 같은 짙은 화장도 벗어버리고, 가벼운 웃음 속에 진심을 섞지 않아도 되는 때가 오지 않을까, 하늘 높은 가짜 뿔을 달고 우쭐거리지 않아도, 내가 가진 진짜 뿔을 가지고 소박하게 노래할 수 있는 때가 오지 않을까.’(‘이미지와 진실’ 중에서)

호란 씨가 아낀다는 존 레넌의 ‘오 마이 러브(Oh my love)’를 들으면 이런 대목이 있다. ‘슬픔도 느껴지네. 꿈도 느껴지네. 마음속에선 모든 게 선명하네.’

이 노래처럼 마음속으로 읽으면 선명하게 다가오는 책. 연예인이 썼다는 선입견 때문에 그 가치를 몰라볼 수도 있지 않을까.

정양환 기자 ra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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