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理知논술/영화, 생각의 보물창고]괴물

  • 입력 2006년 12월 5일 03시 0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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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픽 이혁재 기자
그래픽 이혁재 기자
《‘괴물’. 역대 한국영화 흥행 1위(관객 1301만 명)를 기록한 정말 괴물 같은 영화죠. 그런데 ‘괴물’은 괴수(怪獸)영화 치고는 참 이상합니다. 한참 뜸을 들이다가 막판에 ‘짠’하고 전신을 드러내야 마땅할 괴수가 당혹스럽게도 상영시작 10분이 채 못 되어 온몸을 드러냅니다. 그것도 백주대낮에 말입니다. 게다가 괴물에겐 ‘고질라’나 ‘에일리언’ 같은 멋들어진 이름도 없지요. 그저 ‘괴물’일 뿐입니다. 영화 ‘괴물’은 이렇듯 미국 할리우드산 괴수영화들이 고착화시킨 장르의 법칙을 살짝 비틀면서 우리의 기대를 의도적으로 비껴갑니다. 그러면서 그 안에 괴물만큼이나 무시무시한 메시지를 감춰두고 있지요.》

[1] 스토리라인

게을러빠진 한 남자 강두(송강호). 그는 한강 둔치에서 아버지(변희봉)와 함께 매점을 운영하며 살고 있습니다. 어느 날 한강에 괴물이 나타납니다. 순식간에 둔치로 올라와 사람들을 닥치는 대로 살육한 괴물은 강두의 중학생 딸 현서(고아성)를 낚아채 한강 어딘가로 사라집니다.

죽은 줄로만 알았던 현서에게서 휴대전화를 받은 강두. 그는 “휴대전화 위치 추적을 해달라”고 경찰에 요청하지만 경찰은 강두의 말을 믿어주지 않습니다. 괴물과 접촉한 사람들이 철저히 격리 수용되는 가운데, 괴물이 괴(怪)바이러스를 퍼뜨린다는 뉴스가 전해지면서 시민들은 불안에 떨기 시작합니다. 결국 강두와 아버지는 현서를 찾기 위해 현서의 삼촌 남일(박해일), 고모 남주(배두나)와 함께 괴물의 본거지를 찾아 나섭니다.

[2] 주제 및 키워드

‘괴물’의 주제가 ‘환경오염의 폐해’라고 생각하나요? 미군 부대에서 무단 방류한 독극물(포름알데히드)이 생물체에 돌연변이를 일으켜 괴물을 탄생시킨다는 점에서, 괴물은 환경오염이 가져올 재앙에 대한 은유라고도 볼 수 있겠죠. 하지만 이런 시각은 영화를 너무 액면 그대로 받아들인 것인지도 몰라요.

좀 더 깊이 들어가 볼까요. 강두 가족의 ‘신분’을 살펴보는 데서 시작해 보죠. 강두 가족은 말 그대로 ‘힘없는 소시민’입니다. 강두의 유일한 꿈은 100원, 500원짜리 동전을 틈틈이 모아 딸에게 휴대전화를 사주려는, 작지만 소중한 것이었습니다. 현서 삼촌은 대졸 실업자이고, 고모는 망설이다 늘 시간초과로 과녁을 맞히지 못하는 양궁선수입니다. 이렇게 ‘힘없고 결핍된’ 강두 가족은 현서를 괴물에게 잃으면서 180도 변합니다. 총과 화염병으로 무장하고 괴물에 맞서 사투를 벌이는 전사(戰士)로 거듭나는 것이죠.

무기력하기만 했던 강두 가족이 왜 이렇게 돌변했을까요? ‘가족애’가 그 이유의 전부일까요? 아닙니다. 이들 가족의 분노를 결정적으로 촉발시킨 건 현서가 괴물에게 끌려간 뒤 국가가 이들에게 보여준 차가운 태도였습니다. 휴대전화 위치 추적만 하면 즉각 현서의 위치를 알 수 있음에도 경찰(국가)은 강두의 말을 곧이듣지 않습니다. 현서를 잃은 강두 가족의 아픔을 어루만져주기는커녕 오히려 “괴물 바이러스에 감염되었다”면서 강두를 벌레 취급하죠.

결국 강두 가족은 ‘경찰도 국가도 그 어떤 권력도 나와 가족을 진정 보호해 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은 겁니다. 스스로 무장하고 괴물을 찾아 나서는 것 외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는 것이죠. 과거 민주화를 위해 화염병을 던졌던 삼촌. 그는 정작 민주화가 되었지만 국가로부터 버림받은 채 실업자로 전락한 자신을 한탄하며 냉혹한 시대의 변화를 탓합니다. 이제 그는 국가가 아닌, 자기 자신과 가족을 위해 (괴물을 향해) 화염병을 던지는 것입니다.

영화의 클라이맥스를 볼까요. 괴물에게 휘발유를 부워 괴물을 불태워버리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인물은 난데없이 등장한 노숙자입니다. 그는 사회의 아웃사이더죠. 영화는 여기서 왜 하필 노숙자를 등장시켰을까요? ‘괴물’은 강두 가족을 비롯한 사회의 소수자들이 국가권력의 어떤 보호도 받지 못한 채 위험천만한 자위 노력을 벌이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국가권력의 허상’과 ‘버림받은 개인’을 풍자하고자 했던 겁니다. 딸의 영정을 앞에 두고도 꾸벅꾸벅 조는 아버지 강두의 모습이 그저 한심하기만 하다고요? 아닙니다. 강두 같은 소시민이 폭력적인 국가권력으로부터 탈출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기회는 눈을 감고 잠에 빠져 스스로 정신을 놓아버리는 그 순간뿐인지도 모르니까요.

[3] 더 깊게 생각하기

이런 질문을 던져봅시다. ‘왜 하필 괴물은 한강에 살고 있을까?’ 질문에 대한 대답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영화 속 ‘한강’과 ‘괴물’이 각각 무엇을 상징하는지가 드러납니다. 사실 ‘한강’과 ‘괴물’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이니까요.

①한강=한강은 영화에서 낯익은 동시에 낯선 공간입니다. 한강은 낭만적인 자연물이 아니라, 칠흑같이 어둡고 음습한 유기체인 양 묘사되고 있죠. 우리가 무심코 지나다니는 한강 다리 밑에 기실은 오랜 기간 괴물이 서식해 왔다는 설정은 무엇을 암시하는 걸까요? 일단 ‘항상 우리가 당연시 해온 어떤 대상이나 현상 속에 사실은 무시무시한 뭔가가 잉태되어 왔다’는 걸 말하려 한다는 추정이 가능합니다.

자, 그럼 이제 ‘한강’에 초점을 맞춥시다. ‘한강’ 하면 가장 먼저 무엇이 떠오르나요? 맞습니다. ‘한강의 기적!’ 세계가 놀랄 만큼 빠른 속도로 근대화를 이룬 한국의 발전상을 규정한 한마디가 아닐 수 없습니다. 영화 속 한강은 다시 말해 한국이 이룬 ‘고도성장’ 혹은 ‘고속발전’을 상징하는 단어라고 할 수 있죠.

②괴물=괴물은 또 어떤 함의를 지녔을까요? 괴물은 분명 ‘한강이 오랜 세월을 두고 잉태한 무시무시한 존재’입니다. 앞서 ‘한강’이 ‘고도성장한 한국’에 대한 은유임을 밝혔죠? 그러니까 이번엔 ‘한강’ 대신에 ‘고도성장한 한국’이란 말을 넣어서 앞의 문장을 재구성해 봅시다. 결국 괴물은 ‘고도성장한 한국이 오랜 세월을 두고 잉태한 무시무시한 존재’를 나타낸다는 사실을 추론해낼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영화 속 괴물은 알고 보니 ‘우리 안의 괴물’이었습니다. ‘한국의 고속발전이 우리 마음속에 남긴 그림자’에 대한 은유였던 것입니다. △개인을 진정 보호해주지 않는 기만적인 국가권력 △뇌물을 쓰지 않으면 어떤 것도 작동하지 않는 부패한 사회 시스템 △진실을 캐기보단 선정적 뉴스에만 몸이 닳아 있는 매스미디어 △서로에 대한 믿음과 소통을 단절한 채 파편화 되어버린 개인. 이는 모두 고도성장의 속도감 속에서 한국과 한국인의 내면에 독버섯처럼 자라난 ‘괴물’들이었다고 영화는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영화의 첫 장면은 의미심장합니다. 한강 다리 난간을 붙잡고 선 한 남자는 시커먼 한강을 내려다보며 이렇게 말합니다.

“너네 방금 봤냐? 물속에 커다랗고 시커먼 게….”

주위 사람들이 말뜻을 알아채지 못하자, 남자는 “끝까지 둔해빠진 새끼들…. 잘 살아라!”라는 말을 남긴 채 한강에 투신자살합니다. 이미 남자는 ‘괴물’의 정체를 알고 있었던 겁니다. 속으론 이렇게 울부짖었는지도 모릅니다.

“사람들아! 어리석구나. 알지 못하느냐. ‘커다랗고 시커먼’ 부패와 가치의 혼란이 얼마나 치명적인 부메랑이 되어 우리에게 되돌아올지를…. 괴물이 되어 돌아올지를….”

이승재 기자 sjd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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