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동네]클레지오 "내 소설은 참여문학"

  • 입력 2001년 10월 15일 21시 22분


프랑스에서 활동하는 세계적인 소설가 르 클레지오(61)가 14일 대산문화재단과 주한 프랑스대사관 초청으로 한국을 처음 찾았습니다. 방한 첫날은 모로코 출신 흑인인 아내 제미아(사막 기행문 하늘빛 사람들(문학동네) 공동저자)와 함께 경복궁 등을 방문했습니다.

15일 오후 4시에는 서울 남대문 인근에 자리한 프랑스문화원에서 50여명의 내외신 기자가 참석한 가운데 기자 간담회가 열렸습니다. 훤칠한 키에 여윈 얼굴의 르 클레지오는 수줍움을 타는 듯 인터뷰 내내 책상을 응시하며 나직한 목소리로 자신의 문학관을 설명했습니다.

다음은 기자들과의 일문일답 내용 전문입니다. 말미에는 4차례로 예정된 르 클레지오 강연회 일정과 주제를 정리했습니다.

-한국을 방문한 소감을 듣고 싶습니다.

=3년 전에 파리 갈리마르 출판사에서 소설가 이청준씨를 볼 기회가 있습니다. 그때 대산문화재단측에서 절 초청하겠다는 의사를 보였는데 지금 그 약속이 실행되어 기쁩니다.

저는 사실 아시아 지방에 대해 좀 알고 있습니다. 1년전에는 태국에서 교수로 지냈고, 일본과 중국을 방문한 적도 있습니다. 한국은 이번이 처음입니다.

한국에 오기로 결심한 계기는 저의 작품이 여기서 지속적으로 번역되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제 첫 소설(<조서>)부터 최근작까지 꾸준히 번역 소개되고 있다는 사실에 상당한 호기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도대체 왜 한국에서 내 책이 계속 소개됐는지 의아했습니다.

제가 생각으로는 프랑스와 문화가 아주 다른 한국에서 제 소설을 읽기에는 어려움이 있으리라 짐작했습니다.

-지금까지 작품에서 보여준 주된 관심사는 무엇인가요. 인간 내면, 혹은 인간 사이의 관계, 혹은 인간 외부의 사회, 이중 어느 것이라고 말할 수 있으십니까.

=그 모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간관계를 생각하지 않고는 인간내면 말할 수 없습니다. 제 생각으로는 이런 점에 있어서는 자서전, 전기, 픽션 모두 다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덧붙이고 싶은 것은, 소설은 역사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불어로 역사를 뜻하는 이스트와르(histoire)는 이야기하다는 뜻도 있습니다. 소설에서 이야기와 역사는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이죠. 작가라면 반드시 역사에 관심을 갖게 되고, 그런 이야기가 모여서 역사가 되는 것이 아닐까요.

-작가가 된 계기는 무엇입니까. 혹시 작가의 삶을 후회한 적은 없는지요.

=저는 작가라는 것이 직업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작가가 되고싶다는 다짐만 가지고 되는 것도 아닙니다. 여하튼 저는 작가가 됐고 다른 일을 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랬다고 성공했을 것 같지도 않습니다.

8-9살때부터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체험을 글로 써보는 습관을 가지게 됐습니다. 쓰지 않으면 체험하지 않았다는 느낌이 들 정도였습니다. 그것이 제가 작가가 된 계기라고 하겠습니다.

한가지, 지금도 제 삶의 일부를 작품으로 쓰고 있지만, 쓴 것이 제 체험의 전부도 아니고, 쓴 것 역시도 완벽하지 않아서 늘 불만족스럽습니다.

-아까 말씀하신 '불평등한 세계화'에 대해 구체적으로 말씀해주십시오.

=먼저 제 가족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저는 프랑스인 어머니와 영국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아프리카 동쪽 작은 섬인 모리셔스섬에서 태어나서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프랑스 식민지로 있다가 1968년 독립했습니다. 저는 아직도 이 아프라카 섬나라의 국적을 갖고 있습니다. 저는 프랑스 교육을 받았고 프랑스 문화에 대한 연대감을 갖고 있지만, 심정적으로는 늘 모리셔스섬의 주민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경험이 일찍부터 세계화에 대한 관심을 갖게 만들었습니다. 한 문화가 다른 문화 지배를 할 수 있는 것인지에 대해서요.

문학이야 말로 평등한 상태에서 교류를 가능하게 해줍니다. 이스마엘 카다레라는 작가는 알바니아라는 소수 나라 출신이지만 한국에서도 그의 작품을 읽는 것이 가능합니다. 번역을 위해서는 알바니아의 언어와 문화를 극복해야 하는 어려움은 있지만요. 이런 교류는 문학이 본질적으로 평등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제가 제3세계에 쭉 관심을 가져온 것은 사회 불평등을 고발하기 위해서는 아닙니다. 제 나름대로 느끼고 본 그들의 문화를 표현하고자 하는 것 뿐입니다. 각 문화는 나름의 표현 양식과 진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군사정권에서 민주화 투쟁을 벌였던 광주에서 강연회가 있는 것으로 압니다. 혹시 작품중에서 민주화를 위한 투쟁을 다룬 소설이 있는지요.

=그것을 직접적인 주제로 쓴 적은 없습니다. 그와 연관된 주제를 작품으로 만든 적은 있습니다. 사실 민주화는 모든 작가들의 관심사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프랑스는 참여문학의 전통을 만든 사르트르와 까뮈의 영향을 받은 세대입니다. 그들의 아이들이라고 표현할 수 있겠습니다. 그래서 저 역시 한 사회의 민주화에 대해 사명감 같은 것을 느끼고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더 이상 말로가 <인간의 조건>에서 썼던 것처럼 작품을 쓸 수 없습니다. 다른 방식의 글쓰기를 찾을 필요가 있는 것이죠. 저에겐 참여문학을 통해 민주화를 위해 투쟁하는 것이 복잡한 것으로 생각됐습니다. 민주화는 단순히 참정권만 얻어내는 것을 뜻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미 민주화가 이뤄진 현대적인 국가라 하더라도 사회내부 인종차별, 남녀차별 등 내부 불평등이 있습니다. 이런 발전된 사회에서도 차별과 인권을 다룬 소설을 쓸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정치적이지 않지만 참여는 할 수 있는 것이죠. 소설을 통해 이런 기여가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첫 소설부터 지금쓰고 있는 신작에 이르기까지 제 작품 모두가 참여소설이라고 생각합니다.

-미국에 대한 연쇄테러와 뒤이은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공격 등 극단적인 갈등에 대해서 어떤 생각을 갖고 있습니까. 혹시 앞으로 이를 소재로 작품을 쓴 생각은 있는지요.

=먼저 식민지에 대해 말하자면 제 아버지가 나이지리아에서 의사를 했습니다. 저는 일찍부터 식민지가 번성하고 해방되는 것을 보고 자랐구요. 그래서 식민주의가 어떤 것인지 잘 알고 있습니다.

제가 20세가 되었을 때 알제리 전투가 일어났습니다. 그때 저는 군복무중었기 때문에 하마터면 여기에 참전할 뻔했습니다. 참전하기 싫었기 때문에 알제리 식민지해방에 대해서 찬성하는 입장이었죠.

글을 쓰면서 오랫동안 남미에 살았던 적이 있습니다. 아직 제가 완숙하지 않기 때문에 여기서 이때 경험한 것을 직접 작품으로 쓰지 않았습니다만, 이 때 체험은 제 인생과 작품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저는 식민지를 가지고 있는 국가들이 식민지에다 회사를 차리고 현지 인력을 동원해서 얻은 생산물로 발전하는 것을 지켜보았습니다. 이같은 카오스 상태를 쓰는 것이 글쓰기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최근 미국 테러에 대해서는 비극적인 상황이 하나 더 생긴 것이라고, 카오스에 또 하나의 카오스를 보탠 것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경제적 지배 상태에 있는 나라와 사회적 차단 상태에 있는 나라 사이에 일어난 불행이죠.

아직 이에 대해서 글을 써 보겠다는 것은 생각은 없습니다. 하지만 참담한 심정을 금할 수 없습니다. 저는 모든 전쟁에 대해서 반대합니다. 아무리 그악한 경험을 했더라도 이것을 전쟁으로 대응하는 것은 반대합니다.

-이런 폭력적인 세계에서 문학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저는 오늘날 소위 말하는 세계화가 아주 불평등하게 진행된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문학이 문화간의 평등한 관계를 가능하게 해줍니다. 문학이야말로 어떤 궁극적인 모델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문학은 상상의 작품, 평등의 예술이기 때문에 세계 문화 평등에 이바지한다고 믿습니다.

다른 문화를 이해하는 것은 조화를 찾아가는 것입니다. 이런 동요의 시대에 문학이야말로 평화의 메시지를 주고 다른 문화간의 조화를 가능하게 합니다. 적어도 문학에서만큼은 어느 문화에서 나온 것이 낫다고 말할 수 없고 모두 평등하기 때문입니다.

-데뷔작 <조서>는 23세때 쓴 작품입니다. 여기에서는 문명 이전의 세상과 차단된 우울한 세계가 그려져 있습니다. 젊은 날에 이토록 우울한 감성에 빠진 계기가 있었습니까.

=사실 <조서>는 처음 발표됐을 뿐이지 제 첫 소설은 아닙니다. 젊은 날에는 반항적인 작품을 많이 썼습니다. <조서>를 쓰기 얼마전에는 알제리 전쟁이 터졌습니다. 파병을 피하기 위해서는 정신이상을 가장해서 요양원에라도 들어가야 하는 상황인 탓에 그렇게 암울하고 도발적인 작품을 쓰지 않았나 싶습니다.

물론 지금은 삶에 여러 변화의 계기가 있었습니다. 예전에는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이 지금은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습니다. 예를 들어 젊었을 때는 개인과 사회의 길항작용이 중요하다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아닙니다. 남미 인디언의 생활을 체험하면서 집단생활이 중요하다는 깨우침을 얻었습니다.

-강연 주제로 보카치오와 로트레아몽의 선택하셨는데, 특별한 이유라도 있습니까?

=두 사람의 작품은 '보편적인 문학'의 두 축이라고 생각해서 선택했습니다. 보카치오가 <데카메론>을 썼을 때는 흑사병이 창궐하던 시대였습니다. 지금 우리의 상황과 비슷한 시대가 아닌가 싶습니다. 문학은 한편으로는 그때처럼 흑사병을 물리치는 주술적인 기능을 갖습니다.

로트레아몽은 문학의 다른 중요한 양상인 문화혼합의 좋은 예라고 여겨집니다. 라틴 아메리카에서 태어난 그는 라틴 문화와 프랑스 문화를 혼합했고, 결국 프랑스의 전통적 문학형식을 파괴했습니다.

-한국의 소설을 보신 적이 있습니까.

=한국에 오기전에 이청준씨의 소설을 읽었습니다. 그가 여기 주류 작가인지는 모르겠지만 독특한 계열의 작품이라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예언자>를 읽었는데 환상적인 요소와 사실적인 요소를 잘 배합한 놀라운 작품이었습니다. 어제 서울 관광을 할 때도 소설에 등장한 거리가 어디인지 찾아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클레지오 선생은 서구문명에 대한 한계에 대해 비판하고 회의하면서,그 대안을 제3세계의 전통적 가치에서 찾으려 합니다. 서구문명에 문제가 있다면, 그 안을 들추어내서 직접 대결하는 방식의 글쓰기는 생각해보지 않았습니까?

=제 작품을 잘못 읽으신 것 같습니다. 저는 서구 모든 문명을 비판 받아 마땅하고, 소멸되어져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서구 중심의 세계화를 비판하는 것은 어느 쪽이 다른 어느 쪽을 지배하는 것이 옳지 않으며, 이를 없애야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죠.

우리가 서구문명이라고 단순화해서 말하지만, 사실 그 안에는 수 많은 문화가 모여있습니다. 서구 문화 안에서도 힘을 쓰는 민족과 그렇지 못한 민족이 합쳐 있는 것이죠. 저는 특정 문화가 다른 문화를 지배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다는 사실을 말할 뿐입니다.

그렇다고 지배당하는 문화가 모두 좋다는 것은 아닙니다. 인권에 대한 유린이나 노골적인 남녀 차별 등은 제3세계에서도 심하게 벌어지고 있습니다. 이런 지배적인 문화화 지배당하는 문화가 공히 부정적인 면모를 개선 시킬 수 있는 것은 정치적인 구호가 아니라 일상적인 작업을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소설이야말로 일상적인 작업을 통해 이런 변화를 이끌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작품 낭송회에서 선보일 <혁명(Revolutions)>은 어떤 작품인지 소개해 주시겠습니까.

'회귀'나 '돌아옴'을 주제로한 소설입니다. 마야신화에서는 다람쥐 챗바퀴를 인간의 시간성으로 여깁니다. 위에 있다가 돌아서 아래로 내려오는... 이 소설에는 어려가지 시간성에 대한 이야기가 담겨 있습니다. 1부는 프랑스혁명을, 2부는 모리셔스 섬의 노예해방을, 3부는 모리스섬에 있던 유럽인들이 파산해 떠나는 이야기가 담겨 있습니다. 이번에 낭송할 것은 2부입니다.

-이 자리에는 참석하지 못한 부인 제미아를 소개해주신다면?

=제 부인을 소개할 기회를 주셔서 상당히 만족스럽습니다(웃음). 시차적응을 못해 아직도 숙소에 있어서 함께 여러분과 만나지 못했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제 아내는 특별한 여성이고 훌륭한 창작력을 갖고 있습니다. 그리고 매우 관대한 사람입니다.

▶르 클레지오 강연 일정

16일(화) 오후4시 교보생명빌딩 10층 대강당

<복카치오를 위주로 한 자유에 관한 문제들>

17일(수) 오후3시30분 이화여대 인문관 111호

<로트레아몽을 위주로 한 자유에 관한 문제들>

18일(목) 오후 3시 서울대 박물관 강당

<문학에 관한 문제들>

19일(금) 오후4시 전남대학 경영대 동백홀

<세계화에 관한 문제들>

<윤정훈기자>digan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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