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현의 바둑세상만사]일수불퇴

  • 입력 2000년 9월 26일 19시 26분


바둑판 위에 한번 둔 돌은 어떠한 경우에도 무를 수 없다. 매우 준엄한 이 규정은 프로기사의 바둑에서 엄격하게 적용된다. 프로기사는 한번 착점하면 절대 무를 수 없다. 그 수가 명백한 실수인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만약 프로 기사에게 무르기가 허용된다면 시합으로서의 바둑은 의미가 없어진다. 그들은 바둑을 직업으로 하고, 대국 결과에 따라 수입이 좌우되므로 무르기를 허용할 수 없다.

프로기사들이 초읽기에 몰려 아슬아슬하게 바둑을 둘 경우 관전자들은 으레 가슴을 졸인다. '다섯...여섯...일곱..' 매정하게 초를 읽어도 둘 생각을 안한다. 그러다 '여덟...아아...홉...' 하는 순간에 전광석화처럼 손을 움직여 착점을 한다. 애꿎게도 가슴을 쓸어내리는 건 관전자다. 저러다 혹 실수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러나 프로기사들은 평소에 훈련이 잘 되어 있어서 이런 경우 어지간해서 실수를 하지 않는다. 혹 실수를 하더라도 결과는 자신이 책임져야 한다. 급해서 다른 자리에 놓았으니 한수 무릅시다 할 수 없는 노릇이다.

아마추어 애기가들의 바둑은 양상이 사뭇 다르다.

"어어... 이거 뭐야? 단수 아니야? 한 수 물러."

"이 사람은 단수도 모르고 바둑 두나?"

"단수면 단수라고 말을 해야지. 난 몰랐잖아. 물러줘."

이러면서 돌을 슬쩍 옮긴다. 상대가 받아주면 다행이지만 안된다고 우기면 갑자기 언성이 높아진다. 친한 친구 사이도 이때는 얼굴을 붉히면서 되니, 안되니 하며 투닥거린다.

한번 둔 수를 무르지 말라는 것은 바둑을 둘 때 신중하게 생각하고 두라는 경고이다. 경솔한 수를 피하라는 충고다. 자기가 둔 수에 책임을 지라는 뜻이다. 그럼에도 책임질 줄 모르고 습관적으로 무르는 애기가들을 주변에서 자주 보게 된다.

우리 인생은 어떨까? 한번 저지른 잘못을 무를 수 없다며 계속 고집 피우는 사람들이 있다. 잘못인 줄 알면서도 무르기 싫어 그대로 방치하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에서 잘못을 깨달으면 무르는 게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 체면이나 명분에 얽매여 뻔한 잘못을 그대로 방치하면 그거야말로 자기 손해다. 무를 수 있다면 무르고 다시 올바른 수를 두어야 한다. 바둑은 상대가 너그러우면 물러주기도 하지만 세월은 절대 무를 수 없기 때문이다.

김대현<영화평론가 아마5단> momi21@unite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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