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 쓰는 선비론]「반골 지식인」 매천 황현

  • 입력 1998년 2월 26일 19시 27분


면암 최익현(勉庵 崔益鉉)은 을사조약에 반대하다 쓰시마(對馬)섬으로 끌려가 “내 늙은 몸으로 이 원수의 밥을 먹고 더 살겠느냐”며 단식 끝에 1906년 굶어 죽었다. 그 시신이 부산항으로 돌아오매 팔도의 백성이 포구로 몰려들어 발을 동동 구르며 죽음을 애도했다. 꾀죄죄한 행색에 괴나리봇짐을 진 사팔뜨기 시골 선비 하나가 목을 놓아 곡을 하고는 만사(輓詞) 6수를 놓고 갔지만 아무도 그를 거들떠보지 않았다.

그 시(詩)중에 일렀으되 “고국에 산 있어도 빈 그림자 푸르를 뿐, 가련타 어디메에 임의 뼈를 묻사오리(故國有山虛影碧 可憐埋骨向何方)”라 하였다. 삼천리 강산이 왜놈 땅이 되었는데 시신이 되어 돌아온들 묻을 곳이 그 어디냐는 외마디 절규였다. 그제서야 좌중은 좀전의 그 시골뜨기가 바로 매천 황현(梅泉 黃玹·1855∼1910)임을 알고 놀랐다. 운집한 군중의 여론은 수백 수천의 만사 가운데 그의 것을 으뜸으로 꼽았다.

남아있는 그의 유영(遺影)을 보면 매천은 지독한 근시였던 듯 도수 높은 돋보기를 쓰고 갓을 썼다. 사시(斜視)기가 있었던 그의 눈빛은 그래서 더욱 매섭게만 느껴진다. 정작 그 자신도 최익현이 세상을 떠나고 네 해 뒤인 1910년 8월, 한일합방의 소식에 식음을 전폐하고 누웠다가 전남 구례 월곡리의 집에서 “나라가 선비 기르기 5백년인데 나라가 망하는 날 한사람 죽는 자 없다면 어찌 통탄스럽지 않으랴!”하는 유시(遺詩)와 절명시(絶命詩) 4수를 남기고 아편덩이를 삼켜 자결하였다.

매천 황현. 그는 세종조의 명재상 황희(黃喜)의 후손이었으되 인조반정 이후 몰락하여 호남지방에서 세거(勢去)한 선비의 집안이었다. 진작에 신동(神童)으로 근동에서 이름이 자자했다.

나이 스물에 청운의 뜻을 안고 서울로 올라온 매천은 당대 젊은 문사로 촉망받던 영재 이건창(寧齋 李建昌)을 찾아가 그 자리에서 서로 그의 지우(知遇)를 입었다. 이후 김택영(金澤榮)을 비롯하여 여규형(呂圭亨) 정만조(鄭萬朝) 이건방(李建芳) 등 쟁쟁한 문인들과 어깨를 나란히 교유하며 도하(都下)에 이름을 떨쳤다.

고종 20년, 그의 나이 29세 때 보거과(保擧科)에 응시하였으나 단지 시골사람이라 하여 2등으로 밀려났고 그나마도 회시(會試)는 나라 형편으로 중지되고 말았다. 34세 때 다시 부모의 간곡한 뜻을 따라 상경하여 생원회시(生員會試)에 응거, 당당 장원으로 급제하였으나 갑신정변 이후 민씨 정권의 부패를 개탄하여 벼슬길을 포기하고 구례로 내려가 칩거해버렸다.

안타까이 여긴 벗들의 거듭된 상경 요청에 그는 “어찌하여 나를 귀신같은 나라의 미친놈들(鬼國狂人)속에 들어가 같이 미친 사람이 되라 하는가”라며 거절하였고 신기선(申箕善) 이도재(李道宰) 등 당대 세도가들의 교제 요청도 거들떠보지 않고 구례땅에 파묻혀 ‘매천야록(梅泉野錄)’과 ‘오하기문(梧下記聞)’의 저술에 몰두하였다.

허세와 위선을 극히 혐오했던 그는 완고한 반골의 지식인이었지만 시세(時勢)를 읽는 안목은 남달랐다. 그의 꼬장꼬장한 직필(直筆)은 당대 ‘매천필하무완인(梅泉筆下無完人)’의 평이 있었을 만큼 추상같았다. 그 붓 아래 온전한 사람이 없었다. “사람마다 주사요, 집집이 참봉(人人主事 家家參奉)”이란 말이 나돌 정도로 문란했던 과거제도, 청일전쟁 당시의 이런저런 정황에 대한 혹독한 비판뿐만 아니라 민씨 정권의 부패와 심지어 허구에 찬 일부 의병운동의 허상 폭로에 이르기까지 그의 날카로운 붓끝은 거침이 없었다.

1907년, 도저히 갚을 길 없던 1천3백만원에 달하는 국채(國債)를 2천만 동포의 단연(斷煙)운동으로 갚자하여 국채보상회가 결성되자 온 국민이 이에 호응하여 전국민운동으로 확산되었다. 그러나 매천은 이 운동이 시작만 있고 끝은 없어 조만간 몇 개인의 주머니로 들어가고 말 것이라고 통탄하였고 그의 말은 과연 적중했다.

나라를 다 결딴내고도 들리는 것은 구구한 변명뿐이요, 책임회피뿐인 것은 예나 지금이나 위정자들의 변함없는 행태다. 세상은 돌고돌아 온 국민의 손에서 금반지를 빼내는 신(新)국채보상운동이 벌어지고 있는 작금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무에 다른가. 다만 그때, 5백년간 이 나라 조선이 선비 기른 보람을 말하며 정작 나라의 녹(祿) 한번 받아보지 못했던 그가 장렬히 자결의 길을 택하니 이는 이 나라 선비의 서늘한 기개를 한몸으로 대신한 것이었다.

그가 죽기를 결심하고 약을 먹은 이튿날 아침, 뒤늦게 이를 안 아우 황원(黃瑗)이 달려오자, 매천은 “내가 약을 삼키려다가 입에서 뗀 것이 세번이었구나. 내가 이다지도 어리석었던가”라고 하였다. 그리고 다시 하루가 더 지나 운명하였다. 그도 막상 죽음 앞에서는 몇번의 망설임이 없을 수 없었던 인간이었다. 이 망설임에서 오히려 그의 인간다운 체취를 느낀다.

중국의 루쉰(魯迅)은 그의 글에서 이렇게 말했다. “사실상 나라가 망할 때마다 순국하는 충신이 몇명씩 늘어나지만 그 뒤에는 아무도 옛 것을 되찾을 생각은 하지 않고 오직 그 몇명의 충신들을 찬미할 뿐이다.”

아,그렇다. 우리의 붓끝은 언제나 뒷북만 친다. 선비는 과연 어디에 있는가. 선비의 정신을 어디 가 찾을까.

정민<한양대교수·국문학>

◇약력

△한양대 국문과 졸업 △한양대에서 박사학위 △저서 ‘한시미학산책’‘조선후기 고문론 연구’‘마음을 비우는 지혜’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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