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우크라이나 스캔들’에 대한 하원 탄핵 조사의 첫 공개 청문회가 열렸던 지난달 13일. 세계 각국 언론의 카메라 수십 대가 들어찬 워싱턴 미 국회의사당을 찾았다. 1층 로비 복도에는 두 개의 긴 줄이 있었다. 한쪽은 일반 방청권자, 다른 한쪽은 취재진의 줄이었다. 취재를 신청한 언론사가 많아 상당수 기자들이 청문회장에 들어가지 못한 채 빈자리가 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30대 백인 남성인 샘 레인 씨는 일반 방청객 줄 뒤쪽에서 우유병을 쥔 생후 14개월의 딸 클레어를 안고 서 있었다. 메릴랜드주 볼티모어에서 왔다는 그는 기자에게 “30분 동안 줄을 섰다. 언제 입장이 가능할지 모르겠지만 꼭 청문회를 직접 보고 싶다”고 말했다. 이어 “내년 11월 대선에서는 반드시 대통령이 바뀌어야 한다. 오늘 청문회는 그 시작이 될 것”이라며 “딸이 어리지만 이 역사적 현장에 같이 있었음을 나중에 꼭 말해주겠다”고 했다.
9월 18일 우크라이나 스캔들에 관한 첫 보도 이후 6일 만인 같은 달 24일 탄핵 조사가 시작됐다. 하지만 뜨겁던 미국인들의 관심은 첫 공개 청문회가 열린 지 불과 3주 만에 빠르게 식어 가는 분위기다. 마리 요바노비치 전 우크라이나 주재 미국대사, 윌리엄 테일러 우크라이나 주재 미국대사 대행, 고든 손들랜드 유럽연합(EU) 주재 미국대사, 알렉산더 빈드먼 육군 중령 등 핵심 증인들은 줄곧 카메라 앞에서 “트럼프 대통령이 재선 승리를 위해 우크라이나에 정적(政敵) 조 바이든 전 부통령 부자의 수사를 압박했다”는 취지로 증언했다.
하지만 트럼프 대통령의 지지율은 요지부동이다. 뇌물 수수 같은 결정적 증거가 새로 나오지 않는 한 타국 정상에 대한 전화 압박만으로 현직 대통령을 탄핵할 수 없다는 의견이 적지 않다. 당혹감에 휩싸인 야당 민주당은 이달 6일부터 재개되는 ‘제2라운드’ 공개 청문회로 반전의 기회를 노리지만 쉽지 않아 보인다.
○ “탄핵보다 옥수수 수확이 더 관심”
탄핵 조사가 ‘찻잔 속 태풍’으로 그칠 수 있다는 징후는 내년 2월 3일 첫 당원대회(코커스)가 열리는 아이오와주 여론에서도 확인된다. 지역신문 ‘스톰레이크타임스’의 아트 컬린 편집장은 최근 라디오방송에서 “탄핵은 코커스에 참가하려는 유권자들 사이에서조차 관심을 받지 못하고 있다. 주민들에게 더 중요한 사안은 올해 풍작인 옥수수 수확”이라고 말했다.
이런 썰렁한 분위기는 1973년 ‘워터게이트’의 탄핵 조사 때와 판이하게 다르다. 워터게이트는 리처드 닉슨 행정부가 베트남전에 반대하던 민주당을 저지하려는 과정에서 자행한 불법 침입, 도청 및 은폐 조작 등 일련의 권력남용 사건을 일컫는다. 뉴욕타임스(NYT)가 당시 관련 방송을 분석한 자료에 따르면 청문회는 15주에 걸쳐 진행됐다.
당시 미국인들은 닉슨 탄핵 과정에 깊이 몰입했다. 특히 닉슨 정권의 부정이 만천하에 드러난 녹음테이프 공개 같은 극적인 상황에선 “청문회 방송이 영화나 드라마보다 더 흥미진진하다”는 평가가 주를 이뤘다. 당시 전 미국 가구의 85%가 청문회를 시청했을 정도로 국민들은 탄핵 과정의 일거수일투족을 주시했다. 청문회가 시작될 때만 해도 19%에 머물렀던 탄핵 지지율은 하원이 탄핵 표결을 실시하던 시점에는 58%로 훌쩍 뛰었다. 여론의 압박을 견디지 못한 닉슨 대통령은 결국 1974년 8월 미 역사상 최초로 자진 사퇴했다.
트럼프 대통령에 관한 탄핵 공개 청문회는 왜 닉슨 탄핵 때만큼의 관심을 불러일으키지 못할까. 공개 청문회에서 나온 증인 발언의 상당수는 하원의 탄핵 조사가 시작되고 핵심 증인들이 비공개 청문회를 했을 때부터 언론에 매일 등장한 내용의 재탕이어서 트럼프 대통령 측에 결정적 타격을 가하지 못했다는 의미다. 이 와중에 트럼프 대통령은 특유의 ‘폭풍 트윗’으로 민주당 진영을 비난하고 가짜 뉴스 등을 언급하며 강하게 반격하고 있다. 이는 오하이오, 펜실베이니아 등 낙후된 공업지대(러스트벨트)의 백인 노동자가 중심인 핵심 지지층을 결집시키는 데 상당한 효과를 발휘한다는 분석이 나온다.
○ 무소속 유권자의 탄핵 반대 증가
“탄핵 조사는 민주당의 쇼예요. 그렇다고 대통령 지지자들이 바뀌진 않습니다. 트럼프 대통령을 비판만 하는 주류 방송사 뉴스는 아예 보지도 않아요.”(라나 리 씨·공화당 지지자·일리노이주 시카고 거주)
“탄핵 청문회를 챙겨봤고 관련 뉴스도 읽었어요. 민주당을 지지하는 제 마음은 여전해요. 내년 대선 때까지 마찬가지일 거예요.”(셸비 씨·민주당 지지자·메릴랜드주 애나폴리스 거주)
최근 기자와 만나거나 통화한 미국인들은 지지 정당에 관계없이 “청문회로 기존 입장이 달라지지 않았다”고 밝혔다. 각종 여론조사로도 확인할 수 있다. 지난달 26일 CNN과 여론조사회사 SSRS의 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50%는 “트럼프 대통령이 탄핵되거나 공직에서 물러나야 한다”고 했고 43%는 “탄핵을 반대한다”고 답했다. 미국인 절반은 탄핵을 지지하지만 나머지 절반은 반대하고 있으며, 이런 추세가 유지될 것임을 예고하는 대목이다.
민주당이 주도하는 하원의 탄핵 조사 지지 비율은 더 떨어졌다. 지난달 19일 정치전문매체 폴리티코와 여론조사회사 모닝컨설트 조사에 따르면 “탄핵 조사를 지지한다”는 응답은 48%로 한 주 전 50%보다 떨어졌다.
공화당과 민주당 지지자 각각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는 이런 경향이 더욱 뚜렷하다. 폴리티코-모닝컨설트의 지난달 26일 여론조사에서 민주당 지지자의 81%는 “탄핵 조사를 지지한다”고 했다. 반면 공화당 지지자의 81%는 “조사를 반대한다”고 했다. “무슨 일이 벌어져도 민주당 유권자는 트럼프 대통령을 반대하고, 공화당 유권자는 대통령을 지지한다”는 일종의 극단적 진영 논리가 횡행하고 있다는 의미다.
눈길을 끄는 부분은 무소속이라고 밝힌 응답자 중 탄핵 조사를 반대한다는 여론이 높아지고 있다는 점이다. 이번 조사에서 무소속 유권자의 47%가 “조사를 반대한다”고 했다. 일주일 전 37%에 비해 10%포인트 올랐다. 타일러 싱클레어 모닝컨설트 부사장은 “탄핵 조사가 시작된 후 이를 반대하는 여론이 가장 높은 수준까지 올랐다”고 진단했다.
○ “이대로 가면 대선 필패” 민주당의 위기감
현직 대통령을 상대로 한 탄핵안 발의 자체가 미국인에게 새로운 뉴스가 아니라는 점도 이런 기류와 연결된다. NYT에 따르면 역대 45명의 대통령 중 24.4%인 11명을 상대로 탄핵안이 발의됐다. 4명 중 1명의 대통령은 재임 기간에 어떤 사안으로든 야당의 탄핵 발의와 마주했다는 뜻이다.
조지 W 부시 전 대통령 집권 당시 야당인 민주당 의원들은 “허리케인 카트리나 참사에 대한 대응이 잘못됐다”는 이유 등으로 무려 35개의 탄핵안을 발의했다.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도 1987년 이란-콘트라 스캔들로 탄핵안 발의 대상이 됐다. 이 탄핵안들은 의회 심사를 통과하지 못했지만 당시 언론지상을 장식했다. 자주 되풀이되다 보니 탄핵을 중차대한 사안으로 여기는 분위기가 옅어지고 있는 셈이다.
민주당은 크리스마스 연휴가 시작되기 전인 이달 셋째 주 하원 표결에 들어갈 방침이다. 6일부터 재개되는 공개 청문회는 헌법 전문가들을 상대로 탄핵 조건을 충족시킬 대통령의 범죄 혹은 위법 행위가 무엇이냐에 대한 심리로 이뤄진다. 어려운 법학용어 등이 등장할 예정이어서 미국인들의 관심이 지금보다 더 떨어질 수 있다.
이런 상황을 잘 알고 있는 민주당 지도부는 불편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당내 일각에서는 “이런 흐름이 내년 11월 대선까지 이어지면 어떡하느냐. 정권 탈환은 물 건너가는 것이 아니냐”는 불안감도 적지 않다. 데이비드 시실린 민주당 하원의원(로드아일랜드)은 폴리티코에 “사람들이 (탄핵과 상관없이) 이미 마음을 정한 것 같다”고 토로했다.
민주당이 주도하는 하원은 4일 탄핵 보고서를 발표했고, 이에 맞서 공화당도 자체 보고서를 내놨지만 양극화된 사회에 변화를 주지 못할 것 같다. 정치판 싸움만 거세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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