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근배의 神品名詩]청화백자매죽문호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12월 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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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화백자매죽문호
청화백자매죽문호
청화백자매죽문호―유자효(1947∼)

매화나 대나무는 그 하나만으로도 아름답거늘
한 뛰어난 화공을 만나
흙 위에서 다시 살아나
천 4백도 불 위에서 구워져
5백 년이 지나도 시들지 않고
다시 5백 년을 싱싱하게 꽃 피울
끝없는 생명을 얻었나니
오 청화백자매죽문호
그리운 이름
다시 어깨와 다리에 연꽃 문양이 둘러졌으니
선비의 매운 혼과
부처의 온화한 손이
이 한 아름 항아리에서 다시 만나고 있어
조선이어
이 땅의 도공들은
어떤 넋을 지녔었길래
평생을 도자기를 굽다
마침내는 장작불 속에 기어들어가
온 몸으로 도자기를 굽고야마는
그 불꽃 목숨으로 빚어낸
고결한 기품을 오늘사 보는 것이 아니었던가
목마른 울부짖음은 깊이깊이 잦아들어
끝없는 고요로 드러냈으니
모든 욕망과 번뇌를 불태운 뒤에
침묵의 아름다움으로 현현한
5백 년 전 조선의 하늘과 땅
청화백자매죽문호 병

“겨울이 오면 봄도 멀지 않으리” 셸리의 시구처럼 겨울보다 먼저 ‘청화백자매죽문호’(국보 219호)가 눈바람 이겨내고 매화향기와 대나무 푸른 기상을 불꽃으로 피우고 있다. 조선의 흙은 흙이 아니었다. 바람과 물, 햇빛과 잉걸불이 섞이고 구워지면서 백옥으로 태어나는 살과 뼈였다.

이 대작은 ‘세종실록’의 ‘오례의’ 편에 보이는 주해호(酒海壺)와 닮았다 하니 고려의 뒤를 이어 조선조 초기 청자를 빚는 명도공과 궁중화원이 짝을 지어 국운 융성과 문화 창달의 기원을 담아 왕실에 바치는 술항아리였을 것이다.

15세기 초 경기도 광주 분원에 관요가 들어서면서 백자예술의 신기원이 시작되었는데 이 항아리는 그 대표작으로서의 품격과 요소를 모두 갖추고 있다. 매화와 대나무가 서로 얼크러져 있음에도 공간배열이 자연스럽고 윤곽을 먼저 그린 다음 안에 색을 칠하는 구륵진채법(鉤勒眞彩法)이라든지 꽃무늬와 겹원문을 번갈아 그린 점, 사실적이며 회화성이 높은 필치에서 신운(神韻)이 감돌고 있다.

시인은 “모든 욕망과 번뇌를 불태운 뒤에/침묵의 아름다움으로 현현한/5백 년 전 조선의 하늘과 땅”이라 떠받친다. 참으로 거룩하도다. 조선의 하늘과 땅을 빚어내는 술 단지여.

이근배 시인·신성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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