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진호 어문기자의 말글 나들이]흥청망청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12월 1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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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진호 어문기자
손진호 어문기자
청년 실업, 노동 개혁 등 어려운 경제 상황은 ‘나 몰라라’ 하면서 총선용 지역구 예산은 알뜰히 챙기고 입법 성과급은 살뜰히 챙기는 게 국회와 국회의원이다. 나랏돈을 호주머니 속의 돈처럼 흥청망청 써댄다.

‘흥청망청.’ 흥에 겨워 마음껏 즐기거나 돈이나 물건 따위를 마구 쓸 때 쓰는 말이다. 이 말은 나랏일은 돌보지 않고 허구한 날 사치향락에 빠졌던 조선시대 연산군 때 생겨났다. 그는 조선 팔도에 채홍사(採紅使) 채청사(採靑使)를 파견해 미녀와 기생을 뽑아 여러 고을에서 관리토록 했다. 기생이란 호칭도 ‘운평(運平)’으로 바꿨다. 운평 중에서도 미모가 뛰어난 기생을 따로 뽑아 대궐에 출입시켰는데 이들이 바로 ‘흥청(興淸)’이다.

‘맑음(淸)을 일으킨다(興)’는 뜻과 달리 역사는 거꾸로 내달렸다. 연산군은 사리에 어둡고 어리석은 암군(暗君), 혼군(昏君)으로 꼽힌다. 그가 흥청들과 놀아나다 망했다 해서 생겨난 말이 흥청망청이다.

흥청망청의 ‘망청’은 무슨 뜻일까. 많은 이들이 흥(興)의 반대말인 망(亡)을 떠올리겠지만 ‘망청’에는 별다른 뜻이 없다. 그저 후렴구처럼 붙은 말이다. 우리말에는 이런 형태의 말이 꽤 있다. 울긋불긋의 ‘울긋’, 울퉁불퉁의 ‘울퉁’, 티격태격의 ‘태격’, 옥신각신의 ‘각신’은 아무 뜻 없이 그저 운율을 맞추기 위해 붙은 말이다.

흥청망청과 함께 떠오르는 낱말이 농단(壟斷)이다. ‘국정 농단’이라고 할 때의 그 농단이다. 농단은 본래 ‘깎아 세운 듯한 높은 언덕’이란 뜻. 옛날 중국의 한 상인이 시장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높은 언덕에 올라 시장의 수요와 공급을 미리 파악한 뒤 부족한 물건을 사들여 비싸게 팔아 폭리를 취했다. 그때부터 농단에 거래를 좌지우지해 이익을 독차지한다는 뜻이 생겼다. ‘맹자’의 ‘공손추(公孫丑)’에 나온다. 그 말이 상업상의 이익뿐만 아니라 권리를 과도하게 독점한다는 뜻으로까지 의미가 넓어졌다.

중국 후한(後漢) 영제(靈帝) 때 황제의 신임을 믿고 권력을 휘두른 10명의 환관, 즉 십상시(十常侍)가 국정을 농단한 대표적인 인물들. 얼마 전 ‘청와대 십상시’가 문제가 됐는데 바로 여기에서 비롯된 말이다.

한 해가 저물어간다. 흥청망청 먹고 마시며 제 잇속만 챙기지 말고 이웃과 마음을 나누는 훈훈한 세밑이 됐으면 좋겠다.

손진호 어문기자 songba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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