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한상복의 남자이야기]<37>목도리는 목도리일 뿐… 방패가 되어주지 않는다

  • 동아일보
  • 입력 2012년 11월 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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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운 날도 아닌데 목도리를 겹겹이 걸치는 사람이 있다. 지금 떠들어대는 동창 녀석이 그랬다.

“걔가 오너 3세라지만 소탈해. 나를 친형처럼 따르지.”

오늘 저녁 모임에 어쩌다 낀 주제에 무슨 목도리 자랑을 자꾸 해대는 것인지. 남자는 녀석과 같은 취급을 당하지나 않을까 걱정이 되어 다른 친구들 눈치를 보았다. 전에 장례식장에서 만난 ‘잘나가는 동창들’의 모임에 연락을 받고 참석하게 된 것이었다. 그런데 하필이면….

추울 때 두르는 목도리는 몸을 따뜻하게 해주지만, ‘인간 목도리’는 벌거벗은 자존심을 가려준다. ‘나는 내세울 게 없지만 내 곁에는 엄청난 분이 있으니 함부로 보지 말라’며, 사람들 대부분이 방어용도로 목도리를 쓴다. ‘꿀리지’ 않으려고.

“그 선배는 정부부처 국장인데. 내가 어려운 부탁을 해결해준 뒤로는….”

그러나 어떤 이는 인간 목도리를 공격 즉, 과시용으로 쓴다. 이런 녀석 같은 부류다. 실력자들의 이름을 늘어놓고, 그 위에 자기를 살짝 얹는 고급 기술을 구사한다. 알고 보면 자기가 그 실력자를 좌우한다는 거다.

남자는 형형색색 목도리를 자랑하는 녀석에 대한 평가를 이미 끝냈다. ‘사고치는 중 또는 범죄 실행 중.’

물론 녀석의 주장이 사실일 수도 있다. 하지만 기다란 목도리를 칭칭 감은 이 가운데 십중팔구는 교도소 담벼락 위를 아슬아슬하게 걷는 중이라는 게 그가 경험해본 바였다.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돌아오던 남자는 쌀쌀해진 날씨에 여성들이 두른 숄을 보고는 다시 목도리 녀석을 떠올렸다.

남자에게도 그랬던 때가 있었다. ‘우리 아버지’ 혹은 ‘선배 형’이 자랑의 시작점이었다. 목도리로 남들의 주목을 받았을 때에는 짜릿했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뒷맛이 개운치 않고, 열패감까지 따라붙는 것을 느낀 뒤로는 벌거벗은 자존심일지라도 그냥 추위를 견뎌내는 것이 낫다는 것을 깨달았다.

목도리가 길면 위험한 것이다. 목에 두른 숄이 자동차 뒷바퀴에 말려들어가는 바람에 허무한 죽음을 맞이했던 이사도라 덩컨처럼. 인간 목도리 역시 자존감에는 치명적일 수도 있는 것이다.

남자는 그러나 바로 몇 분 후에 아내에게 목도리를 내밀고 말았다. 늦은 귀가를 추궁하는 아내에게 친구들의 면면을 주워섬긴 것이다. 판사며 의사, 건축사무소장 등.

아내가 정색을 하고 물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이 당신을 친구로 생각한대? 그냥 ‘아는 동창’이 아니고?”

남자는 할 말이 없었다. 목도리는 목도리일 뿐 방패가 되어주지는 않는 것이다. 결국 다른 방법이 없다. 추위를 이기기 위해서는 자기 힘으로 뛰어 몸에 열이 나게 하는 것밖에는.

한상복 작가
#목도리#자존감#자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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