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달이 아니면 어때…누구보다 힘들 심석희 선수에게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1월 29일 18시 1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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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를 마친 17세 소녀는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았다. 가녀린 입에서는 들릴 듯 말 듯 한 작은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많은 분들이 금메달을 기대하셨는데 제 성적이 못 미친 것에 대해 죄송한 마음이 있고요….”

4년 전 이맘 때 열린 러시아 소치 겨울올림픽 쇼트트랙 여자 1500m에서 심석희(21·한국체대)는 은메달을 땄다. 그렇지만 금메달이 아니라는 이유로 그는 모든 사람에게 죄송해야 했다. 이후 여자 3000m 계주에서 금메달을 합작하며 금메달을 받긴 했다. 하지만 기자의 뇌리에는 어린 심석희가 눈물을 글썽이던 모습이 잊히질 않는다.

한국에서 쇼트트랙 선수로 살아가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먼저 올림픽 금메달보다 힘들다는 국가대표로 선발되는 과정이 험난하다. 국가대표 선발전 현장은 전쟁터다. 선수들은 몸을 아끼지 않고 스케이트 날을 부딪친다. 부상을 당하는 선수가 종종 나온다.


어렵게 국가대표가 되고 나면 하루 6시간 이상의 강 훈련이 기다리고 있다. 쇼트트랙 선수들은 전 선수단을 통틀어 가장 먼저 하루를 시작한다. 오전 5시면 빙상장에 모여 스케이트를 탄다. 단체 훈련이 끝나도 밤늦게까지 개인 훈련이 이어진다. 심석희는 그 중에서도 가장 성실한 선수였다. 소치 대회 때 여자 대표팀을 이끌었던 최광복 코치는 “석희는 고통을 묵묵히 감내하는 스타일이다. 부족한 게 있으면 될 때까지 남아 훈련을 한다”고 말했다.

그런 심석희가 얼마 전 ‘폭행 사건’의 피해자가 됐다. 충북 진천선수촌에서 훈련 중이던 심석희는 16일 조 모 코치에게 손찌검을 당한 뒤 선수촌을 이탈했다. 심석희는 18일 대표팀에 복귀했고, 조 모 코치는 영구제명의 중징계를 받았다.

평소 심석희의 성정과 코치와의 관계를 생각하면 고개가 갸웃해진다. 조 모 코치와 심석희는 단순한 스승과 제자 이상의 관계였다. 강원도 강릉에 살던 심석희는 어릴 때 서울로 유학을 왔다. 초등학생이던 심석희를 데려와 성심성의껏 지도한 게 조 모 코치다. 조 코치가 없었다면 심석희는 세계적인 선수가 되지 못할 수도 있었다. 주변에서는 심석희의 페이스가 기대만큼 올라오지 않으면서 마찰이 생겼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결국 문제는 다시 금메달이다. 평창올림픽을 앞두고 한국 선수단은 ‘848’을 목표로 내세웠다. 848은 금메달 8개와 은메달 4개, 동메달 8개를 의미한다. 대한체육회도, 언론도 금메달 8개를 쉽게 얘기한다. 하지만 한국이 금메달 8개를 따려면 ‘효자 종목’이라 불리는 쇼트트랙에서는 최소 5개, 많으면 6개의 금메달이 나와야 한다. 평창올림픽 쇼트트랙에는 총 8개의 금메달이 걸려 있는데 절반이 넘는 금메달을 따야 하는 것이다. 실력이 평준화된 요즘 한 국가가 이만큼 메달을 독식하기란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부담은 조급함을 낳는다. 그래서 올림픽을 목전에 두고 절대 일어나야 할 일이 일어나고 말았다. 심석희를 포함해 안 그래도 힘들었을 선수들은 경기 전부터 부담감에 눌리고 말았다.

폭행 사건 후 심석희는 자신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한 팬이 보낸 편지 글을 올렸다. “메달이 아니어도 후회 없는, 부상 없는 경기로 보상받고 언니가 꼭 행복하게 웃었으면 좋겠어요”라는 글이었다. 정말이지 심석희가 밝게 웃을 수 있으면 좋겠다.

이헌재 기자un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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