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찬식 칼럼]敗者들이 사는 법

  • 입력 2009년 6월 4일 19시 48분


1600년 10월 일본의 세키가하라에서 벌어진 전투는 불과 하루 만에 끝난 싸움이었으나 일본 근현대사의 흐름을 결정지었을 뿐 아니라 한국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전투는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를 따르는 동군(東軍)과 이시다 미쓰나리(石田三成)가 주도한 서군(西軍)의 격돌이었다.

혼란스러운 노무현 현상의 진실

도쿠가와는 임진왜란을 일으켰던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충성을 맹세했지만 가슴속에 천하제패의 꿈을 품은 야심가였고 강한 군대와 지략을 갖고 있었다. 반대편에 선 이시다는 도요토미가 총애하던 신하로 도요토미가 사망하자 의리를 지키며 도요토미 일가를 수호하는 일에 앞장선다. 전투는 이시다의 참담한 패배로 끝났다. 이날 승리로 도쿠가와는 향후 250년에 이르는 장기집권 시대를 열었고, 이시다 쪽에 섰던 다이묘(大名·봉건 영주)와 무사들은 몰락의 길을 걸었다. 일본 작가 시바 료타로의 소설 ‘세키가하라 전투’는 철저히 이시다의 관점에서 쓰였다. 소설은 이시다의 성격적 결함에 답답해하며 운이 따르지 않음을 슬퍼한다. 도쿠가와의 힘에 굴복해 의리를 헌신짝처럼 버리고 배신하는 다이묘들에게 돌을 던진다. 시바는 ‘일본인은 패자에 대한 동정심이 유독 강하다’고 썼다.

한국도 패자에 대한 연민이 강하면 강했지 덜하지 않다. 노무현 전 대통령을 둘러싼 추모 열기는 패자에 대한 동정심이 매우 깊음을 보여준다. 그 연민의 정은 ‘핍박 받는 전직 대통령’이란 이미지에서 나왔다. 우리 사회의 비주류로서 어렵게 최고 권좌에 올랐으나 다시 설움을 받으며 죽음에까지 내몰렸다는 비극적인 스토리가 감성을 자극했다.

지난주 벌어졌던 말의 성찬 가운데 그에게 서민적 체취가 강했으며 서민들이 자신과 동일시하며 더 슬퍼했다는 지적은 이해할 만하다. 그러나 노 전 대통령이 자신이 옳다고 생각한 길을 변함없이 갔던 ‘바보 노무현’이었으며 철저한 원칙주의자였다는 찬사는 빗나간 것이다.

오히려 그는 불확실한 태도로 진보 세력으로부터도 공격에 시달렸다. ‘반미(反美)면 어떠냐’고 말하면서도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을 체결했고 민주주의를 강조하면서도 기자실을 폐쇄하고 취재 자유를 억눌렀다. 최대의 이중성은 깨끗한 정치를 내세우면서 떳떳하지 않은 돈을 받은 일에 있었다. 현재 나타나는 현상은 실체적 내용보다는 밖으로 드러난 이미지에 좌우되는 현대 사회의 포스트모던적인 성격이 짙다.

그가 진정 ‘억울한 패자’인지에 대해서도 의문이 든다. 그가 존경했던 인물은 원래 김구 선생이었으나 미국 대통령 에이브러햄 링컨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이유는 김구 선생이 결국 뜻을 이루지 못한 패자였으며 ‘정의가 패배하는 한국 역사’가 싫었기 때문이라고 그는 적었다. 반면에 링컨은 성공한 대통령이었다는 것이다. 그의 판단기준은 권력을 잡았느냐의 여부였다. 대통령의 자리에 오른 그는 자신의 역사관에서 보면 패배자는 아니다. 그의 공과는 세월이 지난 후 명확해질 것이다.

원칙과 명분이 이긴다

그가 패자로 보았던 김구 선생은 단기적으로 패했는지 몰라도 오늘날 폭넓은 존경을 받으며 생생히 살아 있다.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패배해 숨죽이고 있었던 일본의 변방 사쓰마(현재의 가고시마)와 조슈(야마구치) 사람들은 절치부심하며 힘을 기르다가 19세기 후반 도쿠가와 막부를 무너뜨리고 메이지 유신의 주역이 된다. 세계 경제력 2위 일본의 근대화는 그들 손에서 시작됐다. 그들은 패배자가 아니었다.

패자가 살려면 그들이 명분과 의리를 추구하고 원칙을 지켰을 때 가능하다. 지난해 촛불집회 때에 이어 이명박 정부가 다시 흔들리고 있다. 승패는 반복되는 법이다. 어느 쪽이든 원칙을 중시한 사람은 역사에서 결코 패배하지 않았음을 새겨야 할 것이다.

홍찬식 논설위원 chansi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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