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과의 대화]최재천/자연에서 배우는 共生의 지혜

  • 입력 2003년 8월 20일 18시 4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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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얼마 전부터 ‘호모 심비우스(Homo symbious)’ 즉 ‘공생인(共生人)’을 21세기 새로운 인간의 이미지로 제안하고 더불어 사는 방법을 배워 실천할 것을 호소해 왔다. 그러나 요즘 우리 사회는 하루가 다르게 ‘너 죽고 나 살자’식의 대결 국면으로 치닫고 있다.

노사분규 세대갈등 서열파괴 등의 말에는 절충과 타협보다 상대를 굴복시키려는 살기가 묻어난다.

인간은 정작 개별 존재로 놓고 보면 그리 대단한 동물이 아니다. 크고 날카로운 송곳니를 가진 것도 아니고, 미국 캘리포니아 주지사 선거에 출마한 아널드 슈워제네거 같은 이들 몇몇을 제외하곤 근육이 그렇게 엄청난 것도 아니다. 여느 동물처럼 두툼하고 질긴 털가죽을 갖고 있지도 못하다. 인간의 몸은 종잇장에도 베여 나가는, 연약하기 그지없는 얇은 살갗으로 덮여 있을 뿐이다. 그런데도 우리가 오늘날 만물의 영장으로 군림할 수 있는 것은 바로 고도로 발달한 지능과 협동할 줄 아는 성향 덕택이다.

지능과 협동정신 중 나는 후자에 더 무게를 둔다. 제아무리 높은 지능을 지녔어도 협동할 줄 모르면 큰 성공은 거두기 어렵기 때문이다. 우리만큼 지능이 높은 것도 아니면서 지구 전역에서 번창하고 있는 개미의 힘도 역시 협동에서 나온다. 진화생물학자들은 여기서 “그렇다면 왜 다른 동물들은 협동하도록 진화하지 않은 것일까”라는 질문을 던진다.

지구상에서 협동할 줄 아는 동물은 몇 안 된다. 얼마나 다행한 일인지 모른다. 만일 모기들이 협동할 줄 안다면 어떻게 될까. 모기의 진입을 막겠다고 꽁꽁 쳐 닫은 망사창문을 수만 마리의 모기들이 힘을 합쳐 밀고 들어온다고 상상해 보라.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다.

바퀴벌레들이 협동을 하게 되면 또 어떤 일이 벌어질까. 무리가 달려들어 반찬통을 열어젖히고 실컷 먹어치우는 끔찍한 일이 일어날지도 모른다. 협동의 힘을 터득하고 실천에 옮긴 동물이 그리 많지 않은 덕에 우리가 아직도 잘 먹고 잘 사는 것이다.

그렇다면 협동은 왜 하기 어려운 것일까. 이종(異種)으로서 서로 돕고 사는 동물로 우리가 가장 잘 아는 것은 아마 개미와 진딧물일 것이다.

개미는 진딧물이 안심하고 식물을 공격할 수 있도록 도와 주고 진딧물은 그 대가로 식물에서 빨아들인 즙의 일부를 나눠 준다. 개미와 진딧물 대표가 어느 날 갑자기 마주 앉아 서로 협조하기로 결정한 것은 물론 아니다. 개미와 진딧물의 조상들이 오랜 진화의 역사를 통해 많은 시행착오를 거치며 꾸준히 조율하여 얻어낸 계약이다.

개미는 왜 진딧물을 잡아먹지 않고 꽁무니에서 나오는 그 작은 단물 방울을 감질나게 받아먹고 있을까. 단물 몇 방울에 들어 있는 당분보다 진딧물의 살코기에 담긴 단백질이 훨씬 더 탐나 보이는데….

그러나 바로 눈앞의 이익만 챙기다 보면 자칫 계약 자체가 파기된다. 개미들에게 동료들을 잃기 시작한 진딧물들이 멀찌감치 다른 식물로 옮겨 가면 개미들은 하루아침에 삶의 터전을 잃게 된다. 진딧물의 단물은 많은 경우 개미 식단의 90%를 점유하고 있다.

지구상의 모든 개미들이 다 진딧물과 공생관계를 맺고 있는 것은 아니다. 개미와 진딧물의 역사에도 협동의 고비를 넘지 못하고 결별하고 만 관계들이 적지 않았던 것 같다.

과격한 노사분쟁을 보면서 문득 떠나가는 진딧물의 뒷모습을 연상케 된다. 모기와 바퀴벌레는 당장 눈앞의 탐욕을 조금만 자제하면 훗날 모두 함께 잘 살 수 있다는 걸 터득할 만한 지혜가 없기 때문에 협동하는 동물이 되지 못했다. 원만한 노사관계도 서로 적당히 양보하고 인내할 때 가능한 것이다.

이 땅에 더 이상 노동자를 착취하는 기업주가 있어서는 안 되지만, 노동자도 기업주의 목을 너무 지나치게 죄면 계약 자체가 파기될 수 있다. 공장 문을 닫고 철수하는 외국기업이 많다고 한다. 더 값싸고 협조적인 노동력을 찾아 외국으로 나가려는 우리 기업도 늘고 있다.

최재천 서울대 교수·생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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